시어머니 전상서(2)
늘 정확하신 분이셨다
어떠한 경우에도 본인의 기준에 따라 칼같이 행동하셨던 분
상대방의 처지나 어려운 경우는 안중에 없었다 (그게 자식일지라도)
이름 붙은 날
즉 생일, 추석, 설 명절, 어버이날
선물 `만' 드리는 것은 용납이 안되었다
왜냐하면 본인은 아들 셋을 서울 소재 대학에 입학, 졸업시킨 자랑스러운 엄마이니까
(70년대의 국가경제로 봤을 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터)
꼭 봉투가 함께여야 했는데 아들 셋이 드리는 봉투의 액수에 따라
호칭의 성조가 달라졌다
가령 둘째 아들의 봉투가 단돈 오만 원이라도 더 들어 있으면 둘째 며느리나 아들을
부르는 호칭은 꽤나 매끄럽고, 달콤했다
둘~~~~ 째야 , 설거지를 왜 네가 하니, 힘든데 여기 와서 과일 먹어라.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5중 무쇠솥바닥 같은 나는 어떤 경우에도 불편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가마니처럼 가만히 있었다
아니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작은 평수여도 강남의 18평 새 아파트를 분양받아 온 그녀와는 처음부터 상대가 되질 않았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맏며느리 노릇이 쉬울 리가......
부모님의 가르침도 한몫했다
너는 그 집 귀신이다. 맏며느리는 집안의 기둥이다 등등
개뿔, 기둥은 무슨...
형제사이의 위, 아래 서열 보다, 우애보다는 오직 본인에게 돌아오는
용돈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그분에겐 너무 과한 대우였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결혼생활, 아니 시집살이가 30여 년 지속되었다
그런 무쇠솥이 이혼을 불사하고 다시는 남편 부모님을 보지 않겠다고 선언한 일이 생겼다
한동안 집안이 시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