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의 기억

사과주스

by 대나무 숲

친구와 점심 약속이 있다고 나간 딸이 카톡을 보내왔는데 미처 못 읽었다

그러자 잠시 후 전화가 왔다

엄마 카톡 사진 봐봐 봐

휴롬 세일 많이 하는데 살까?

이제 나이를 먹고 직장인이 된 딸이 친구랑 코스트코 갔는데 휴롬 세일을 한단다

하나 살 까? 하는데 나는 휴롬이 주는 편리함과 불편함을 알기에 망설이자

그냥 산~~~ 다 하며 전화를 끊었다

장 봐 온 것을 보니 결혼했으면 야무지게 살림했을 솜씨다

당근도 사 오고 엄마 좋아한다고 고춧가루도 사고 ㅎㅎ

사 온 기계를 물로 닦고 설명서를 보고 조립하며 잠시 소란스러웠다

당근, 사과를 넣고 스위치를 넣으니 천천히 즙이 만들어진다 넣은 양에 비해 착즙양은 적은 듯하다

세 식구가 한 잔씩 마시며 좋네, 건강 해 지겠다 라며 뒤처리를 하는데 아무래도 조금 번거롭다

나는 이 과정을 알기에 여태 안 사고 버틴 것인데

암튼 본인이사고 좋아하는 딸 기분 생각해 아무 소리 안 하고 찌꺼기 버리고 거름망 닦고

물기 빼려고 모두 엎어 놓고 나니 휴 ~~~ 숨이 나온다

예전에도 이런 종류의 착즙기를 사서 사용해 본 경험이 있어서 번거로운데~ 했지만

지금은 그 당시에 비해 주방일이 반이나 줄었기에 잘 쓰자라고 마음먹었다

오늘도 (토요일) 출근했다 퇴근 한 딸이 내가 재료 소분해 놓은 걸 넣고 주스 한잔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나는 동네 마트의 쓱데이 행사에 사과랑 몇 가지 생필품을 사기 위해 집에 없었다

집에 오니 먼저 먹은 딸이 사과보다 당근 많이 넣어서 먹으니까 더 좋은 거 같아

케일도 넣고 만들어서 드릴게용 한다

사, 당, 케로 한 잔

딸이 가득 따라서 내게 한잔을 주는데 불쑥 나오는 기억 하나

헐 ~~~~ 까마득히 묻혀 있던 기억 하 나

(주스 색깔이 갈변한 사과주스랑 비슷해 보여서일까?)

잊고 있었는데ㅠㅠㅠ


구정 전 날, 남편, 아이들과 화곡동엘 갔다

그 당시 시아버지의 형님 즉 큰아버지 댁에서 차례를 지냈다

전 날은 차례 끝내고 먹을 만두, 전, 잡채 등 음식 준비를 하고,

오후에 시어머니가 큰댁이 사시는 신촌엘 가셨다

산적거리, 국거리 고기를 사 가지고

아침엔 각자 세수하고 옷만 입고 가면 되는 상황이다

전 날 주방 한쪽에 두 둥 하고 못 보던 주방 기계가 보였다

이건 뭐예요 어머니? 하고 내가 묻자 득의양양한 표정의 시어머니 대답

이게 돌 빼고 넣으면 뭐든 갈린대

아유 좋아 보이는데 비쌀 것 같아요 내 말에 시어머니의 표정은 한 층 더 빛났다

목소리를 낮추며 그래서 이 골목에서 나만 샀어 ㅎㅎㅎㅎ

9호 집 형님으로 불리는 시어머니는 골목의 VIP였다

당시 중소업체 홍보팀은 제품을 들고 동네 한 집을 정해, 홈파티라는 이름으로

시연을 하며 물건을 팔았다

어쩌다 가면 못 보던 주방 제품이 늘 있었다

그중 몇 개는 일 년도 안 돼서 우리 집으로 왔다

크고 무거워 보이는 녹즙기였다

아 ~~ 아 잘 쓰시겠어요


아침엔 조금 부산했다

9명의 식구들이 화장실을 사용하며 씻느라

먼저 준비를 마친 시어머니는 주방에서 어제 봤던 녹즙기에 사. 과를 갈고 있었다

다 간 사과즙을 컵에 따라 마치 호텔 웰컴 드링크처럼 방방이 배달했다

옷을 먼저 입은 아이들은 이 방, 저 방 들락 거리고

시아버지 한 잔, 우리 방 세잔, 시동생방 세 잔, 본인 한잔

사람은 아홉 명인데 주스는 여덟 잔이었다

우리 애들이 남기면 나는 먹으라는 시어머니의 암묵적 계산이었다

입이 짧은 우리 아이들도 맛있다 하며 단숨에 들이켰다

넥타이를 매던 남편도 단숨에 들이켜고

비운 잔을 들고 주방으로 가니 갈변이 된 주스잔을 내민다

얘 너 마셔라

뭐예요?

ㅇㅇ에미가 안 먹는데

막내 동서가 안 먹어서 내 놓은 갈변이 된 주스를 마시란다

안 먹어요


왜 좋았던 기억은 하나도 없는 건지

어차피 작년 봄에 돌아가셔서 봉안함에 유골이 되어 계신데

30여 년을 보고 살았는데 문득 떠오르는 기억도 이렇다

모든 시어머니가 다 그렇지 않은데

나만 뭔가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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