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숙려 캠프

하네마네 할지라도

by 대나무 숲

아이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나 혼자 힘으로는 공부를 돌 봐주기 어려웠다

특히 6학년에 올라 간 큰아이의 산수공부는 어려웠다

학원은 절대 안 된다 하고 방문학습지와 문제집만으로 공부하라는데 아이는 한계를 느꼈다

명색이 수학선생 딸내미인데 산수 때문에 아이는 좌절을 느끼고 있었다

남편이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봐주면 좋은 데 남편은 거의, 늘 ~~~

12시가 넘어서 집엘 왔다

정말 징. 글. 징. 글 하게도 마셔 댔다

하다 하다 난로 연통 단다고 점화식이라고 이름 붙이고 마셨으니까

그 당시의 교무실은 무쇠 난로를 놓고 조개탄을 땠다

11월이 되면 난로를 놓는데 이 날조차도 점화식이라고 모여서 먹고,

3월에 난로를 치우면 치운다고 먹었으니까

소풍 답사, 3학년 회식, 수학과 회식, 부장단 회식, 체육 진흥회, 어머니회, 학생운영회

체육대회, 스승의 날.....

정말 손가락이 모자라게 먹어야 되는 날이 이어졌다

일요일은 목욕을 다녀 와선 모자란 잠을 보충하고...

아이들과는 아침에 잠깐 얼굴을 보는 게 다였다

나 혼자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도 가고, 아프면 병원도 가고( 당시 아이들은 자주, 많이 아팠다

특히 작은 아이는 천식을 앓아서 환절기엔 숨을 못 쉬고 입술이 파래져 있을 때가 많았다)

지금처럼 핸드폰도 없을 때인데 혼자 응급실엘 가고 , 입원도 시키고

정말 너무너무 힘들었다

이런 게 쌓여서 내 입에선 그만 살자 소리가 쉽게 , 자주 나온 듯했다

그 당시 남편은 무언가에 홀린 듯 집을 외면하고 오로지 밖에서의 즐거움에 탐닉했다

친정에 말하면 부모님은 월급봉투 꼬박꼬박 주고, 외박 안 하고 늦게라도 꼭 집에 오고,

여자. 도박 문제없으니 네가 참으라고만 하셨다

시집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정도 도 못 참느냐는 비아냥이 섞인 대답뿐이었다

큰아이는 사춘기에 접어드는 시기였든 듯하다

저녁을 먹이고 아이들은 잠자리에 든 이 날도 남편은 역시 12시 넘어서 귀가했다

얼큰하게 취한 남편과 말을 주고받다 점점 격앙되면서 자던 아이들이 깰 정도로 목소리는 커지고

정말로 이혼하자고 , 더는 못 참겠다고 당신 하곤 이렇게 하면서 못 산다고

내가 분노가 가득한 소리를 지른 것 같다

남편 역시 좋다고, 싫으면 그만 살자고 소리를 질렀다

(남편 목소리는 크고 우렁차다. 오랫동안 수업시간을 통해 목소리가 트였는지)

잠에서 깬 아이들은 다 들었을 것이고 불안과 공포에 떨었을 것이다

특히 심약했던 큰아이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지금 다시 생각해도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

아침이 되어서도 냉랭한 분위기는 바뀌지 않은 채 아침을 먹고 아이들과 남편은 학교로 갔다

당시 아이들은 내가 출석하는 교회의 부속 초등학교에 다녔다

아침이면 남편이 차로 학교 앞에 내려주고 본인 학교로 갔다

오후에 학교에서 집으로 온 딸이 내 눈치를 보는 듯해서 일부러 밝게 말을 걸었다

그 당시 급식을 먹었기에 반찬을 물어보고, 뭐 했느냐고 물어보았다

수요일에는 전교생이 교회 본당에서 예배가 있었는데

아이가 예배 시간에 기도 할 때 엄마, 아빠 이혼하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 했단다

아득해지면서, 가슴을 센 주먹으로 맞은 듯 아팠다

먹먹해진 마음으로 아이에게 그런 일 없다고, 엄마가 화나서 그랬다고

염려 말라고 달래 주었다

그러면서 다짐했다

이제부터 내 입에서 이혼이란 말은 없다고 다짐에, 다짐에, 다짐을 했다

요즘처럼 이혼 숙려 캠프가 그 당시에도 있었으면 나와 남편은 어떤 문제점을 지적받았을까?

참고, 눈 흘기며, 속으로 나쁜 놈이라 욕하며, 그래도 분이 안 풀리면 빠듯한 생활비에

곁눈으로만 보던 커피잔도 사고 하면서 나를 달래고 어르며 살아냈다

그렇게 견디고, 세상의 거센 파도를 같이 넘으며 지내 온 지금은 단어 몇 마디로 소통되는 사이가 되었다

먼 친척 오빠같이 지내도, 김 빠진 콜라 같아도, 無味한 지금이 사이가 좋다


ps;딸의 기도가 아직까지 통하고 있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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