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DNA
코로나가 그렇게 오래갈 줄은 몰랐다
한 열흘 조심하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처음 겪는 혼돈과 두려움이었다
마스크는 필수가 되었고, 가족의 장례조차 해외에 있으면 참여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시아버지 장례식에 베트남에 있는 둘째 시동생이 못 들어왔다.)
동네 쇼핑몰에 있는 영화관에 가서 딸과 둘이 심야 영화를 보고 오던 그런 일상은 사라지고
식구끼리 한 끼 외식이라도 하려면 주민등본을 떼 가야 하는 웃픈 현실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숨이 막히고 나가지 말라니 더 나가고 싶고, 갑자기 어디론가 여행을 못하는 현실이 답답했다
교회도 마찬가지여서 당시 내가 출석하던 교회는 새로 분립한 교회인데 1월에 시작한 예배를
3월부턴가 온라인으로 드리게 되었다 오 마이 갓
어쩌겠는가 나라 법이 시퍼런데
목사님은 영상 송출위원과 기도나, 성경 봉독 맡으신 분 등등 10여 명과 텅 빈 공간에서 예배를 드리셨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해야 할 공간은 고요를 넘어 정적만이 흘렀고
안부를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누던 교회 로비도 적막하고 교회가 빌려 쓰는 학교 교정의
목련, 벚꽃은 봐주는 이 없이 홀로 피고 지고...
그렇게 상황에 익숙해지며 어쩔 수 없이 시간 때우기에 최적인 뜨개질을 시작했다
실도 온라인으로 주문하고 라디오 틀어 놓고 뜨다 보면 꽤 속도가 났다
두 남매의 베드 스프레드, 소파 덮개, 무릎 담요, 모헤어실로 뜨는 커튼,
마지막으로는 딸아이 줄 요량으로 만든 커다란 블랭킷
(모티브 하나당 3가지 색으로 연결해 잇는, 600여 개를 떠서 이어 붙이는 좀 힘든 작업,
그중에서도 색의 조합이 제일 어려웠다)
결국 목디스크는 다시 재발하고 왼손이 저리고 아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무슨 정신에 그렇게 떴는지
결국 나도 어쩔 수 없이 별로 좋아하지 않던 엄마의 딸이었다
손이 쉬고 있으면 심심을 넘어 조바심이 난다
하다못해 마늘이라도 까고, 생강이라도 까고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식구들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과일청을 계절별로 담는다
이번 가을엔 애플 시나몬 청, 레몬 생강청 두 가지를 담갔다
며느리에게 먼저 좋아하냐 물어보고 좋다고 하기에 담아서 주었다
아들은 내가 떠 준 베드 스프레드를 깔고 자고 나더니
그동안 깔던 극세사보다 더 따뜻하다고 엄지를 들어 올렸다
(아들은 보풀이 난, 본인이 쓰던 베드스프레드를 결혼하며 가져갔다)
다시 추워지고 여름에는 엄두도 못 내던 뜨개질을 시작하며
며느리에게 뭔가 떠 주고 싶어도 조심스럽다
(어디선가 읽은 시어머니의 뜨개질 선물이 부담스럽다는...
그럴 수 있지 . 취향이 다르면 어쩌겠는가 그래서 주인 없는 블랭킷을 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