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한가운데에

어떤 날의 기억

by 대나무 숲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에 우리 집은 형편이 몹시 어려워졌다

아버지가 친구 분의 제안을 받고 야심 차게 준비해서 출시하신 석유곤로가 말 그대로

고철값만 받고 넘기게 되었다

공장의 천장 가득 쌓여 있던 석유곤로들...

무겁고, 시커멓게 철로 만들어 튼튼하기만 했던 석유곤로는 하필 강적을 만났다

후지카 곤로

빨간 에나멜에 하얀 물받이가 있던 가볍고 예쁜 곤로와 하필 출시가 같은 시기였다

처참한 완패였다

방 네 개에 우물까지 있던 너른 마당, 엄마의 손길로 잘 가꿔진 담 밑의 화단

부엌 뒤편에 뒤꼍까지 있는

넓은 기와집을 팔고 방 두 개가 있는 옹색한 길 건너 다른 동네로 이사를 했다

넓은 기와집에 살며, 그 골목에선 나 혼자 교회 부속 유치원도 다니고 했던 그때부터

국민학교 5학년 까지가 나의 마지막 부유했던 시절이었다

이리저리 재기를 노리시던 아버지는 사촌 오빠의 어음사기로 그 집마저 팔고

정말 태어나서 처음 가보는 달동네라 불리던 동네로 이사를 갔다

그 동네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맡았던 하수구 냄새

엄마의 살림살이는 이집저집 처마 밑으로 보내지고 (왕골 돗자리, 나주소반,

자개가 놓인 교자상, 그릇장, 나무로 깎아 옻칠을 한 여러 층의 목기들 )

우리는 정말 최소한의 짐을 꾸려 부엌 위 다락이 있는 단칸방으로 이사했다.

다락에선 나와 언니가 자고, 부모님과 아들 둘이 함께 자는 그런 상황이 되었다

거기서 언니는 대학을 가고.....

4남매가 초, 중, 고, 대를 다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장이나 장사를 하며 사는 그 동네의 좁은 골목으로 엄마의 자개장이

지나가자 사람들은 놀라며 비켜섰다

거기다 언니는 중학교부터 시험 봐서 들어간 일류 여고 배지를 달고 그 골목을 통과했다

젊은 여자가 지나가면 휘파람을 불며 희롱하던 동네 건달들이 언니가 지나가면 휘파람을 못 불었다

그 어려운 형편에서도 엄마는 언니를 대학에 보냈다

엄마의 자부심이자 긍지

언니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진 우리 집 사정을 알고 조심스럽게

조금 낮은 대학에 4년 장학금을 알선해 주셨는데 엄마는

단칼에 거절하고 언니가 가고 싶은 대학의 입시 원서를 쓰고 왔다


지난번 딸아이 병원을 갔다가 대흥역 앞에 있는 딤섬가게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자 해서

햇살이 좋은 가을을 만끽하며 다녀왔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예전 내가 살았던 동네 이름이 나오는데 갑자기 울컥했다

온통 아파트가 들어 선 걸 보며 지나가는데 마음 한쪽이 아려왔다

그 시절 우리 가족 모두가 애를 쓰며 살아왔던 동네였기에

엄마는 비단 두루마기, 여우 목도리를 벗어 놓고 생업 전선으로 나가셨다

하혈을 하시면서도 군수품 공장에 나가 12시간씩 공업미싱을 돌리며 일을 하셨다

4남매 학비를 마련키 위해서

아버지는 평생을 사장님으로 사셨기에 어딘가의 취직은 쉽지 않았을 터

남의 공장 한구석에 밀링기와 선반을 놓고 심부름을 하는 어린 소년 하나를 두고

부품을 깎아 납품하셨다 그때 부모님의 연세는 50이 넘으셨다

50세가 넘은 두 분의 신산했던 삶의 무게를 이제야 깨닫는다.

1년 반인가를 살고 방 두 개가 있는 주거 환경이 조금 더 나은 아래 동네로 이사를 왔다

엄마가 내 대학 입시를 완벽하게 막은 집이었다

4남매 중 유일하게 , 입학원서도 만져 보지도 못했던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그렇게 20대를 보냈다.

취직도 , 공부도, 연애도

그 당시 내 친구들은 모두 인문계 여고를 나와 대학진학에 실패하고 그냥저냥 놀고 있었다

집안사정이 어려운 친구는 없었고 집에서 살림이나 배우다 나이 차면 괜찮은 혼처를 만나

결혼하라는 그런 상황이었다 (당시 사회 분위기도 그랬다)

여상을 나온 친구들은 무역회사나 어디든 취직이 됐고 인문계는 취직이 어렵기도 했다

우리는 시간은 많았다

일행 중 한 명이 파마를 하러 가면 2~3명은 기본으로 같이 가주고,

옷 사러 같이, 드문드문 들어오는 미팅도 같이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주어 진 시간을

고장 난 수도꼭지의 물처럼 흘려보냈다

엄마는 내가 쓸 최소한의 용돈은 주셨다

취직을 하라거나, 공부를 하라는 등의 어떤 주문도 없이 그냥 내버려 두었다

나중에야 깨달았다. 애지중지 까지는 아니었어도 부모님은, 특히 아버지는 나를 많이 아끼셨다

무심히 바라 봐 주시던 사랑

그런 상황 속에서 나는 무위도식이 몸에 밴듯하다

결혼하고 나서도 일반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의 남편 급여보다 30%는 적은 교사 봉급에

나는 늘 뭔가 적고 어림없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온 것 같다

물론 비교하면 우리보다 적은 봉급도 있었을 텐데 , 나는 그런 걸 염두에 두진 않았다

이 적은 봉급으로 살아나는 나 자신만 대단히 기특하게 여기며 살았다.

피해의식이 있었던 것 같았다 나만 늘 적게 받는다는

그래도 조금 더 아끼고 살았어야 했다

삶의 어느 부분에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대학을 못 갔더라도 열심히 노력해서

9급 공무원 시험이라도 보고 싶다 (그 당시는 좀 수월했다)

거기서 열심히 근검절약, 노력하며 내 생을 차곡차곡 채웠어야 하는데 그러 질 못했다

엄마에 대한 원망이 더 컸기에 손에 쥔 모래처럼 그냥 흘려보냈다

같이 교회를 다녔던 어떤 친구는 안 그랬다

그녀는 고교 졸업 후 9급으로 들어가 40여 년을 근무하고 재작년 3급으로 퇴직했다

행정사라는 직위와 함께

어느 순간의 결핍이 나의 불성실함을 그래도 된다고 생각해서 두둔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스스로를 이만큼 하면 됐다고 인정하면서

그러기엔 생은 너무 짧다

어느 순간도 허투루 보내라고 하지 않는다

생의 한가운데를 보내고 노을이 보일 때쯤 깨달은 삶의 지혜

인생의 시계는 너무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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