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봉투
연금생활자로 산 지 십 년이 된다
보너스니 상여금이니 인센티브니 다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매월 25일이면 정확히 연금이 들어오고 이 달을 사는 게 아니라 지난달 살아낸 것을 카드값으로
갚고 나면 거의 비어있는 통장잔고 (달리 모아 둔 통장이 없음을 요즘처럼 뼈저리게 느낀 적이 없다)
현금을 만져 본 기억이 요즘은 드물다
통장에서 카드회사나 공과금으로 빠져나가고 적은 액수의 돈도 계좌이체면 되는 정말 편리한 시절이다
나는 결혼 전 딱 9개월을 양평동에 있는 식용유 회사에서 총무과 미쓰리로 있다가 결혼과 동시에
퇴사를 했다. 사촌 오빠가 조금 높은 자리에 있어서 매일 빈둥거리는 나를 회사에 넣어 주셨다
결혼 후 더 다닐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고 10월 결혼을 앞두고 9월에 퇴사를 했다
그 당시는 월급을 타면 엄마를 우선 드렸다
그러면 엄마는 나 쓸 용돈을 주셨고 나는 용돈으로 한 달을 살았다
남편과 연애할 때는 남편과 나도 직장인이므로 경양식 집도 가서 함박스테이크에 마주앙도 마시곤 했다
결혼하고 일주일, 신혼여행을 다녀와 출근 한 첫날이 남편 월급날이었다
남편은 출근을 하며 저녁 6시까지 광교 양복점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하고 나갔다
다음 달 결혼하는 시동생이 예단으로 가져온 양복감을 가지고 양복을 맞추러 가기 위해서이다
아마 시어머니의 허락이 있었고, 저녁은 먹고 오겠다고 미리 말씀드렸을 것이다
남편 양복을 맞추고 남편은 육류를 잘 안 먹는 내가 그나마 명동의 전기구이는 먹으니 그걸 먹으러
가자 했고 광교에서 명동까지 결혼 한지 일주일이 넘은 우리는 손을 잡고 걸었을 것이다
명동에서 전기구이도 먹고, 이제 나오기 어려울 테니 커피숍에 가서 거품을 올린 비엔나커피도
마시고 신혼의 우리는 그렇게 데이트를 즐겼다
아마 저녁 9시쯤 됐을 즈음에 집에 도착해 남편은 월급봉투를 시어머니께 드리고
우리 방으로 왔다
당시 시집에는 시부모와 시동생 둘, 그리고 우리 부부 그렇게 6명이 방 셋의 단층 주택에서 살았다
남편과 내가 옷을 갈아입는데 방문이 벌컥 열리며 한복고쟁이에 분홍 꽃무늬가 있는 가을 내복윗도리를 입은
시어머니가 남편의 월급봉투를 들고 들어 왔다( 이런 기억은 왜 이렇게 생생한지)
너 이거 뭐 하는 짓이냐?
어디서 못 배워 처먹은 짓을 해!!!
악을 쓰며 그 월. 급. 봉. 투를 내 얼굴에 던졌다
25~6만 원으로 기억되는 당시 초봉 중등교사의 월급이 내 얼굴에 쏟아졌다
만 원짜리, 천 원짜리가 펄펄 춤을 추고 백 원, 십원 동전이 뺨에 닿았다, 방바닥으로 굴렀다
남편이 밥값으로 만 원짜리 한 장을 말도 없이 빼서 썼다고 그사달이 난 것이다
누런 갱지? 에 서무실 직원이 일일이 수기로 적은 월급봉투
나는 감히 손도 못 대보고 그 봉변을 당했다
황급히 옷을 갈아입고 봉투에 돈을 차곡차곡 담아 안방으로 들어가
결혼 일주일 차의 신혼부부가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노라고.........
시어머니가 악을 쓰고 봉투를 던지던 방문 밖에는 다음 달 결혼 할 둘째 시동생
대학 2학년의 막내 시동생이 얼핏 보고, 듣고 있었다
높은 베개를 베고 누워 TV를 시청하던 시아버지는 못 배워서 그래
그래서 배운 여자를 들여야 하는데 흐~~~~ㅁ
시어머니는 벽을 보고 누워 있었고 우리는 TV에서 애국가가 나올 때까지 무릎을 꿇고 잘못했노라고 빌었다
(이 사건은 플래시를 터뜨려 찍은 사진처럼 40여 년이 지났음에도 선명히 남아있다)
그 후 시어머니는 내게 너네 월급은 본인 화장대 서랍에 있으니 쓰고 싶은 만큼 갖다 쓰라 했다
단 한 푼도 손도 못 대고 결혼 전 갖고 있던 비상금으로 목욕비나, 생리대를 샀다
일 년이 지나가니 그 돈도 떨어지고 화장품도 떨어져 갔다
남편이 B통장으로 들어오는 보충 수업비나, 출장비로 학교에 가방을 들고 오는 아*레 아줌마에게
로션과 크림을 사다 주었다
안 하던 물일에 손이 다 트고 손등에 피가 맺혔다
나는 돈이 많은 부자를 부러워하거나 꼭 돈이 많아야 된다고 배우자를 정하지 않았다
아마도 어린 시절에 아버지의 부침을 겪어서 인지 무의식 중에 돈보다는 안정적인 가정을 바랐던 듯싶다
월급이 매달 따박 따박 들어오는 (시아버지도 경찰 공무원이셨다)
부모님이 최선을 다하시긴 했어도 자상 하거나, 따뜻하시진 않았기에
나는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과 시부모를 바랐는데
현실은 최악이었다
산 넘어 산이라고 시어머니는 날이 갈수록 더 했다
첫애를 낳을 때도, 우리를 결혼 2년 차에 그 달의 월급 반만 주고 쫓아낼 때도
악랄했다고 이제야 감히 말한다
내가 나에게 물어본다
어떻게 견뎠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