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내미는 어릴 적부터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많이 들었다. 프라하 심포니와 협연한 마이클 폰티의 연주를 작은 라디오 CD 플레이어에 넣고 들었다. 언제 어디서 이 곡을 듣고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 곡을 좋아하게 된 것도 딸내미의 영향이 있었을 듯싶다. 그리고 딸내미와의 클래식 연주회 첫나들이도 이 곡이었다. 딸내미 나이 10살 전후였고 러시아 ㅇㅇ교향악단의 KBS홀 연주였는데 피아니스트가 누구였는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딸내미와의 첫 클래식 나들이라는 소중한 추억이어서 인지 잊히지 않고 마음속에 남아있다.
공대에 입학한 딸내미는 자연 이공 계열로 진로를 결정지어 가던 고등학교 1학년 중간쯤까지도 피아노를 전공하겠다며 소동을 벌이곤 했다. 아이는 피아노를 배우며 작은 콩쿠르에 나가 수상을 했었고 학원 선생님은 음악에 재능이 있다고도 했다. 무엇보다도 아이가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겁부터 났다. 피아노를 전공하려면 막대한 돈이 들 거라는 것이 현실적인 이유였다. 그리고 너무 늦었다는 이유는 아이를 설득시킬 가장 큰 무기였다. 그러자 딸아이는 이제 피아노 전공이 아니라 공연 기획 관련 학과를 가겠다고 협상을 해왔다. 집 앞 공원에 나가 이야기하며 눈물을 훌쩍이기도 했다.
결국은 포기. 지금도 이 결정이 아이의 인생에서 옳은 결정이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워낙 감수성이 풍부하고 음악을 좋아했던 아이였기에.
딸내미의 마음속에 피어나던 음악 전공에 대한 미련은 어찌 되어 있을까?
딸내미가 많이 들었던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CD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창밖에 눈이 수북이 쌓여 있는 겨울에 들으면 제맛이다. 하지만 무더운 한여름에 들어도 더위를 싹 날려버릴 수 있을 만큼 시원한 곡이기도 하다. 빰 빠빠빠~~ 꽝, 빰 빠빠빠~~ 꽝, 빰빠빠 빠~~, 호른의 호쾌하고 장엄한 소리로 시작하는 도입부는 눈부시게 빛나는 러시아 설원의 쭉쭉 뻗은 나무를 보는 것처럼 듣는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뚫어놓는다.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이 뭐지?’할 사람들도 이 첫 도입부만 들으면 “아, 이거~!”라며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곡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4대의 호른으로 호쾌하게 시작하는 충격적인 느낌, 그리고 이어서 피아노와 현악기가 연주하는 유려한 서정성 때문이 아닐까.
1악장 도입부도 인상적이지만 3악장 피날레의 마지막 약 2분 전쯤부터 시작하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총주는 긴박감 넘치는 대비와 조화를 이루며 거대한 폭포와 같은 엄청난 사운드로 귀를 호강시킨다.
차이콥스키와 그를 14년간이나 후원했던 폰 메크 부인
19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표트르 차이콥스키 Pyotr Tchaikovsky(러시아 1840-1893)는 광산 기사 아버지와 음악을 좋아하는 프랑스계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뜻대로 법대를 졸업하고 법무성에서 근무하기도 했으나 음악에 대한 애착을 버릴 수 없어 1863년에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해 공부했다. 그는 흔히 서유럽적이라고 불리지만, 발라키레프를 중심으로 하는 국민악파 ‘5인조’들과도 만나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그는 러시아적인 향토색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낭만적 선율을 매력적으로 표현한다.
차이콥스키는 여제자 안토니나와의 결혼에 실패하는 등 여자복(女子福) 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 그에게 엄청난 여자 후원자가 생겼으니 폰 메크 부인이 바로 그 여인이다. 그녀는 대부호의 미망인으로 차이콥스키의 나이 서른일곱 살부터 무려 14년 동안이나 절대적 원조를 했다. 차이콥스키가 신경쇠약증으로 고생하는 등 그의 생애에서 가장 어려웠고 또 음악적으로 중요했던 시절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것이다. 그 덕분에 차이콥스키는 경제적으로 안정되었으며 정신적으로도 큰 위로를 얻았다.
그런데 그들은 단 한 번의 만남도 없이 천 통이 넘는 편지로만 왕래하며 플라토닉 한 사랑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서로 만나지 않은 것이 그토록 오래도록 경제적 원조를 지속하게 했던 복(福)으로 작용했었나 보다. <피아노 협주곡 1번>, <바이올린 협주곡>, 교향곡 <비창>, 발레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등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그의 수많은 위대한 유산들은 어쩌면 메크 부인의 절대적인 원조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감사할 일이다.
2011년 제14회 차이콥스키 콩쿠르 3라운드에서 '혼을 갈아 넣는 연주'를 보여주는 손열음의 연주 실황
1악장 - Allegro non troppo e molto maestoso
4대의 호른에 이끌려 피아노가 테마를 꺼내는 양상으로 시작하는 열정적이면서 우아한 주제 선율이 천둥 같은 우렁찬 피아노 화음과 함께 등장한다.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신경전을 벌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뤄가는 과정이 재미있다. 이 악장의 4분의 3 지점에서 폭발하듯 몰아쳐 나오는 ‘화음의 폭포’ 부분은 도입부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2악장 – Andantino semplice-Prestissimo
현의 약한 피치카토에 실려 플루트가 감미로운 테마를 꺼내는 악장이다. 이어서 첼로와 오보에로 인계되어 주부를 형성하는 악장으로 서정적인 안단테 악장과 스케르초를 섞어 놓은 평화로운 모습을 연상시킨다.
3악장 - Allegro con fuoco
피아노 협주곡 역사상 가장 맹렬하고 장대하며 스펙터클한 악장으로 손꼽힌다. 오케스트라의 네 마디 서주 후부터 펼쳐지는 피아노의 굵고 거친 슬라브 무곡풍의 론도 주제와 이어지는 간결한 가요적인 부주제가 잇달아 펼쳐지며 조화를 이룬다. 특히 마지막 피아노 코다(악곡을 끝내기 위해 특별히 추가된 마침 부분)와 이어지는 오케스트라 총주는 터질 듯 벅차오르는 러시아의 호방함과 저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