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커피 중독자다.
내가 커피 중독자가 되는 과정은 자연스러웠다.
커피 모름 → 바닐라라테 입문 → 아메리카노 입문 → 아메리카노 1일 1잔, 생명수 → 아메리카노 1일 2잔 → 아메리카노 1일 3잔의 중독자
청소년기에는 커피의 맛을 전혀 알지 못했다. 아니, 아예 관심이 없었다. 고등학교 수험생활을 할 때에는 잠과 매일 사투하면서도 커피 마실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정신력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잠은 허벅지를 꼬집거나 스탠딩 책상에 서서 공부하는 것뿐이었다. 정말 피곤했던 때에 믹스커피를 한두 잔 마셨는데, 그것은 1년에 한두 번이 채 되지 않았다.
20살에 막 성인이 된 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다니는 것에 로망이 있었다. 한 손에는 전공서적이나 노트북을 들고, 다른 한 손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다니는 거다. 마치 그러는 게 진정한 어른이 되는 거라 생각했다. 대학교 때는 '술'이라는 로망도 있었지만, 나는 '커피'에 대한 로망도 유독 컸던 것 같다. 드디어 벼락치기 시즌이 되고, 그토록 고대하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샀다. 학교 건물 내에 있는 자체 브랜드 커피였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한 모금 들이킨 순간, 나는 이것이 어른의 맛이구나 하고 느꼈다. 커피는 정말 맛이 없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커피가 정말 이런 맛이냐고 물었고, 친구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나를 쳐다봤다. 원두나 브랜드의 차이가 아니었다. 그냥 내가 기대한 맛이 아니었다. 물에 이상한 쓴 가루를 탄 듯한 느낌이었다. 그 뒤로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대한 환상은 사라졌다.
하지만 성인이 되니 생각보다 커피를 마실 일이 많아졌다. 조별과제를 한다거나 동기들과 시간을 보낸다거나 할 때 카페를 자주 갔다. 그때마다 매번 다른 음료를 마실 것도 없었거니와, 다시 커피에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아이스 바닐라 라테, 일명 아바라를 택했다. 아바라는 내 입맛에 딱 맞았다. 달달하니 맛있는 커피 맛이었다. 그 후로 나는 커피를 마실 때면 무조건 아바라를 마셨다. 친구들은 나보고 애기 입맛이라고 했다. 아직 으른 입맛은 나에게 어려웠나 보다.
그렇게 22살쯤까지 2년간은 아바라만 마셨다. 그런데 아바라는 다들 알다시피 달달하다. 어느 순간 이게 너무 달다고 느껴졌다. 그때가 23살이었던가. 나는 이제 어른 입맛이 되었다고 생각했고, 다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도전했다. 여전히 맛은 없었지만, 예전처럼은 아니었다. 쓰긴 했지만, 생각보다 못 마실 맛은 아니었다. 그래서 단 음료가 당기지 않는 날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시작했다.
24살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맛에 눈 뜨다.
나는 바닐라 라테와 아메리카노를 번갈아 마시다가, 점점 단 음료에 물렸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날이 훨씬 많아졌다.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찾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리고 드디어 맛있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나는 20살 때의 로망을 실현하기 시작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이제 아메리카노를 먹냐고 하며 놀랍고도 아쉬운 눈치였다.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한(?) 기분이라고 하면 될까. 나는 스스로가 뿌듯했고 멋있었다.
커피를 본격적으로 매일 마시게 된 건 25살쯤인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매일'이다. 본격적으로 미래를 준비하게 되면서 열심히 살기 시작한 시기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카페인이 꼭 필요했다. 그래서 커피를 정말 하루에 한 잔씩 마시기 시작했다. 잠을 깨기 위해 의무로 마시기 시작한 건 이때였다. 커피가 어른들의 멋있는 무언가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여름 어느 날에 친구랑 경주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뚜벅이 여행으로, 관광지를 걸어 다니다가 너무 덥고 지쳐서 카페에 들어갔다. 그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키는 그 시원함을 잊을 수가 없다. 물보다 상쾌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없이 살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때 드디어 커피 중독자가 되었다. 회사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커피는 생명수'라는 말을 처음으로 이해했다. 괜히 나온 말이 아닌 듯했다. 아무리 잠을 충분히 자도 소용없었다. 출근을 하면 무조건 커피를 마셔야 했다. 아침잠을 깨우기 위해 마셨고, 점심에도 졸지 않기 위해 커피를 마셨다. 이후에는 저녁에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느라고 마셨고, 그렇게 나는 하루에 커피를 3잔 마셔도 아무렇지 않은 몸이 되었다. 커피에 대한 로망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점심시간마다 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찰나의 산책을 하는 무리 속에 내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제는 커피를 정말 살기 위해 마신다. 더 정확히 말하면 습관처럼 마신다고 해야 하나. 현대 사회는 만성 피로의 시대가 아닌가. 나 역시 그에 한몫하고 있다. 커피가 맛있는 게 다행일 따름이다. 최근에는 커피를 조금만 마셔도 심장이 너무 뛰어서 마시지 않는다는 사람들을 간혹 볼 때가 있는데, 그들이 너무 신기하다. 나는 그런 느낌이 없거니와, 커피를 마셔도 밤이 되면 잠을 잘 잤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활동시기에 커피로 잠을 깰 수 있고, 밤에는 고생 없이 바로 잠을 잘 수 있어서 축복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커피 중독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적고 보니, 한편으론 신기하기도 하다. 입에도 못 대는 것부터 시작해서 하루 3잔의 중독자가 되기까지 5-6년뿐이 걸렸다. 짧다면 아주 짧은 시간이다.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시는 것은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부로 여기서 더 커피량을 늘리지 않겠다고 이곳에 선언한다. 더 이상의 중독을 막아야겠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