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문대 할망의 신화가 있는 산방산을 거쳐, 구석기 인류의 발자국이 화석으로 전해오는 사계 해안의 어디쯤에서 숨비기꽃을 처음 만났다. 흐릿한 내 눈에 비친 꽃은 마치 보라색 물방울들이 둥근 풀잎 사이에 고인 듯하였다. 해안을 따라 쭉 뻗은 올레 양쪽에 발목까지 자란 숨비기 나무들이 가득했다. 잎을 따서 향을 맡아보니 박하 향과 비슷한 향기가 났다. 6월 말 찜통더위 속 숨비기잎 향기가 시원한 해풍 같았다. 자원봉사자와 함께 걷는 올레가 처음이던 그 시절, 힘들어도 쉬어가자고 말은 못 하고, 어떻게든 잠시라도 발걸음을 멈춰볼 요량으로 김 선생님께 이 식물에 관해 물었더니 앞서가며 이야기해 주었다.
해녀들이 저승과 가까운 물속에서 일할 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숨을 적당히 조절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몇십만 원씩 하는 야생 전복을 만나게 되면 숨 한 번 꼴딱 삼키며 일하다가 목숨 줄을 놓치게 되거나, 숨이 모자라 급히 물 위로 올라오면서 잠수병에 걸리게 된다고 한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마음이 들 때, 숨 한 번을 참지 말고, 쉼표를 찍듯 숨을 내쉬기 위해 물 위로 올라와야 한다. 자식의 학비 걱정, 남편의 노름빚 걱정, 부모님의 병원비 걱정을 뒤로하고 한 번 숨을 쉬기 위해 위로 올라와야 한다. 그때 물 위에서 내쉬는 한숨 같은 소리가 ‘숨비소리’다. 해녀들은 물질하러 들어가기 전 숨비기나무의 연초록 둥근 잎 또는 쑥잎을 따서 수경을 닦는다고 한다. 어쩌면 이 행동은 간절함에 눈이 흐려져 숨을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일지 모른다. 이 나무의 열매도 해녀들에게는 상비약이었는데, 관절통, 이명, 난청, 어지럼증, 호흡곤란 등이 나타나는 잠수병 치료에 효과가 컸기 때문이다. 김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이들에게는 숨비기꽃과 열매가 또 하나의 '테왁'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년간의 박사학위 과정에서 나는 만성 위염, 이명, 신장결석, 담석, 골다공증에 시달렸다. 이후 지자체 연구원 생활 1년 동안 당뇨 전 단계, 고지혈증, 이석증 등이 여기에 더해졌다. 의사는 “생활 나이는 사십 대 후반인데 건강 나이는 육십 대 후반”이라며,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면 업무량을 줄이거나 스트레스를 덜 받도록 노력하라고 했다. 그 당시 계약직 연구원이었던 나는 업무량을 조정할 수가 없었다. 정식 연구원이 되기 위해서는 성과가 필요했다. 다른 연구자들에게 시각장애가 있어도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여기까지 힘들게 왔는데,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았다. 오랫동안 뒷바라지해 준 아내에게도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고, 아이의 학비도 감당해야만 했다. 마음은 간절했지만, 몸이 따라주지 못했다. 늦게까지 보고서 작업을 하고 퇴근하던 어느 날, 보고서 10개쯤 쓰고 나면 ‘은퇴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때까지 내 몸이 견딜 수나 있을까? 혹 견딘다고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까? 자신이 없었다. 흰 지팡이를 짚고 가던 발걸음을 멈춰 밤하늘을 쳐다봤다. 희미한 가로등 불이 자꾸 어둠 속으로 잠겨 드는 것만 같았다.
아직 송악산은 멀었는데, 올레 10코스 해안로의 오전 햇살은 신고식을 치르는 것처럼 입문자에게 가혹했다. 해안가 모래 구릉 위로 올라가자, 여름 햇살을 넉넉히 가려줄 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나는 김 선생님께 쉬어가자고 어렵게 말을 꺼냈는데, 선생님도 마침 힘들었다며 나무 그늘로 안내했다. 무거운 배낭을 내팽개치듯 벗어버리고 주저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드러눕고 싶었지만, 처음 만난 자원봉사자 앞이라 다리를 쭉 뻗고 배낭에 기대는 것으로 대신했다. 숨비기나무로 가득한 모래사장 너머 푸른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내 몸의 열기와 가쁜 숨을 식혀주는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았다. 바다 너머에서 가늘고 긴 휘파람 소리 같은 것들이 간간이 바람에 실려 왔다. 머리 위 나뭇가지 위에서, 그리고 현무암 근처 수풀 속에서 화답하듯 이름 모를 바닷새들의 지저귐이 울려 퍼졌다. 가슴을 타고 푸른 파도가 밀려드는 것 같았다. 제주 올레를 처음 걷던 그날, 내 영혼의 숨비소리를 듣기 위해서 와야 할 곳이 바람의 섬 제주라는 걸 깨달았다.
* 아랑조을 올레 10코스 정보
1) ‘아랑조을’이라는 말은 ‘알아두면 좋은’이라는 의미의 제주어이다.
2) 올레 10코스의 시작은 화순 금모래 해수욕장이다. 올레꾼들이 보통 점심을 먹는 송악산 주차장 근처 식당까지는 총 6.9km 거리이며, 저시력 시각장애가 있는 내 걸음으로는 보통 2~3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아름다운 제주 서남쪽 해변 길이라 파도 소리,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가끔 날씨가 좋을 때 해녀들의 숨비소리도 들을 수 있다. 화순 금모래 해수욕장에 올레 공식 안내소가 있으며, 산방산, 용머리 해안, 사계 포구, 화석 발자국 전시관, 송악산 주차장 등에는 화장실이 있다. 시각장애인 입장에서 산방산 둘레길 쪽은 계단이 많고 중간마다 숲길이 있어 난이도는 '중' 정도로 생각된다(등산 경험이 있는 시각장애인 기준이며, 보행 시 안내자가 동반할 경우임). 형제섬을 보며 걸을 수 있는 사계 포구에서 송악산 주차장까지는 해안로가 올레길이라 바닥이 평탄하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걷기에는 좋지만, 3.2km 구간이 아스팔트 재질 자전거 도로를 따라가야 하므로 발바닥이 피곤하고 자전거 충돌 위험이 있다. 이 구간을 올레에서는 ‘무장애 올레길’이라고 칭한다. 코스 시작에서 송악산 주차장까지는 거의 그늘이 없는 편이다. 또한 해변 길이라 바람도 거세니 트래킹할 때 끈이 있는 등산 모자를 챙겨가길 추천한다.
3) 숨비기나무는 마편초과의 나무로서, 한반도에서는 중부지방 이남의 해안가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모래나 자갈에서도 잘 자라며, 염분이 있어야 자라는 염생식물이다. 키는 20~80cm 정도까지 자라는 작은 나무로서, 잎은 달걀 모양이고 둥글다. 이 잎에서는 특유의 향기가 나기 때문에 향수나 방향제로도 이용되고, 제주에서는 목욕할 때 입욕제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 나무의 뿌리는 환경 측면으로도 중요한 구실을 하는데, 파도로 인한 해안 침식을 막아준다. 여름에 보라색 꽃이 피며, 화관은 3~5갈래로 갈라진다. 꽃말은 ‘그리움’이다. 열매는 가을에 갈색으로 익는데, 동그란 모양이다. 열매는 한약재로도 쓰이는데, ‘만형자(蔓荊子)’라고 불리며 잠수병, 두통, 불면증에 좋다고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순비기나무로 표현하고 있으나, 민간에서는 순비기 또는 숨비기로도 사용되는 바 이 글에서는 숨비소리와 연결하여 숨비기로 통일하여 사용하였다.
4) 제주어로 ‘테왁’은 해녀들이 물속에서 채취한 전복, 소라, 해삼 등을 담아두는 바구니를 물에 띄우기 위한 부력 도구이다. 해녀들은 물질할 때 자신의 위치를, 테왁을 통해 표시할 수도 있고, 물속에서 나온 후 잠시 휴식을 취할 때 몸을 기대는 부력 도구로도 활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