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슬봉

by 누리숲

모슬봉 위를 훑고 가는 거친 바람도 불꽃같은 햇살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날은 모슬포 바다부터 쫓아오던 햇살이 현무암 밭담을 까맣게 태우고 내 목덜미와 팔뚝 위에 옮겨붙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 위로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햇살의 추격도 모슬봉 기슭 곰솔 숲을 만나니 주춤 뒤로 물러섰다. 윙윙대는 바람 탓일까, 솔잎 가득한 어둑한 숲길 속에서 청량한 솔향기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혀준다. 이것도 잠시, 곰솔 숲이 끝나고 공동묘지로 가는 오르막길에는 다시 땡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원봉사 주 선생님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아이고, 겁나게 덥네... 징하구만...” 하는 소리를 연발하면서도 산담 사이 가파른 오르막길을 잰걸음으로 잘도 올라갔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주저앉을 것 같은 심정이 들었을 때 올레 11코스 중간 스탬프 지점에 도착했다. 올레 패스에 도장을 찍고 간세 근처 나무 그늘에서 점심을 먹었다. 내가 김밥을 꺼내자, 주 선생님은 얼려온 제주 쌀 막걸리와 열무김치를 꺼냈다. 열무김치에 곁들인 얼음 막걸리 한잔에 땡볕 더위의 고단함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20여 년 전 그날은 땡볕 밑에서 나 혼자 낮술을 마시고 있었다. 맹학교 근처 구멍가게에서 술 한 병을 사다가 담벼락 그늘에 쪼그리고 앉아 병나발을 불었다. 내 신세가 한심스러웠다.

실명한 후 나는 더 이상 작업치료사로 일할 수가 없었다. 눈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는 다른 직업도 마찬가지였다. 중도 실명한 사람에게 그나마 가능한 직업이 안마사였는데, 안마사가 되기 위해 나는 맹학교 고등부로 편입했다. 특이했던 건, 편입을 위해 대학 졸업증명서가 아닌 고등학교 졸업증명서가 필요했는데 인터넷 발급 서비스가 없던 시절이라 졸업했던 고등학교에 직접 찾아가서 졸업증명서를 받아와야 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나는 모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계실 은사님들을 뵐 낯이 없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 이런 것일까? 시각장애인이 돼 버린 나 자신이 초라하고 부끄러웠다. 거기다가 매일 계속되는 고등부 이료재활반의 해부학이나 공중보건학 같은 수업을 듣고 있으면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대학에서 수많은 시간을 들여 배운 내용들이었고 이미 국가고시를 통해 면허증도 있었다. 특수교육을 전공한 시각장애인 선생님이 교과서를 더듬대며 읽어주는 내용들이 초짜들의 헛짓 같기만 했다. 대부분의 수업에 집중할 수 없어 새로 배우기 시작한 점자로 다른 내용을 읽거나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기가 일쑤였다. 마치 1시간이 하루 같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던 그날, 결국 나는 해부학 수업을 땡땡이치고 혼자 낮술을 퍼마셨다.

그러나, 낮술의 취기도 번쩍이며 내 눈을 가르는 햇살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확 하고 짜증이 일어났다. 어쩔 수 없는 저 태양에, 유전질환으로 희미해져 버린 내 시력에, 거지같은 이놈의 운명 때문에 미치도록 화가 났다. 온통 선택하고 싶지 않은 것들에 선택 당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날씨도, 유전질환을 넘겨준 부모도, 망해버린 이 운명도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들이지 않은가? 나는 태양을 노려보며 왜 내게, 왜 나를 선택했냐고 따져 묻고 있었다. 터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도 선택하고 싶다고, 선택할 거라고 하얗게 빛나는 태양을 향해 삿대질하며 고함을 질렀다. 씩씩거리다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오기가 났다. 혈액형도, 피부색도, 짜리몽땅한 내 키도, 거기다가 내 시각장애도, 하다못해 날씨도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눈을 감은 채 묻고 또 물었다.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선택할 수 있으며, 운명의 장난질에도 놀아나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번쩍하고 술이 깨는 느낌이었다. 그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마음’뿐이었구나! 내 삶을 희롱하는 운명 앞에서 마음 하나만은 지키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수업 벨이 울리는 맹학교로 나는 휘적대며 걸어 들어갔다.

“어떻게 눈이 안 보이는데 상담 공부를 시작했냐?”라는 주 선생님의 질문을 받고, 술기운을 빌어 쏟아낸 지난 이야기 때문에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쌩’하고 바람이 불었다. 얼음 막걸리에 얹힌 바람 때문일까?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배낭을 둘러메니 어깨가 한결 가벼웠다. “오마! 등에 있던 게 배로 가니 날아가겠네. 잉...”하는 주 선생님의 우스갯소리에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무덤을 품고 있는 산담들 사이로 내리뻗은 시멘트 길 위에 번쩍이는 햇살은 여전했지만, 하늘을 찌를 듯 내지르는 매미들의 합창 소리가 마음을 다잡아 준다.


아랑조울 올레 11코스: 하모 체육공원에서 모슬봉까지

1) 제주도에는 돌담이 많다. 밭에 있는 돌담을 밭담이라 부르고, 무덤을 두른 돌담은 산담이라고 부른다.

2) 올레 11코스의 총길이는 17.3km인데, 중간 스탬프 간세가 있는 모슬봉 정상까지는 5.5km이다. 올레 10코스의 중간 스탬프가 코스 2/3 지점에 있고 11코스 중간 스탬프는 코스 1/3 지점에 있다는 점을 볼 때, 대부분의 올레 코스 중간 스탬프 위치가 지역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트레킹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다. 11코스 시작점에서 9.2km 지점인 정난주 마리아 성지까지 공용 화장실이 없다. 또한 편의점이나 식당도 11.2km 지점에 있는 신평 사거리까지 가야 있다. 화장실 사용이 어려우니 음식물 섭취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또한, 하루에 완주를 계획하고 있다면 출발을 서둘러야 한다. 만약 여유 있는 출발을 원한다면 간식을 준비하길 권유한다. 올레 코스 중간에 있는 식당들은 농촌 지역에 있다 보니 손님이 없는 경우 일찍 문을 닫는 경우가 흔하며, 점심 영업도 오후 2시경에 브레이크타임을 갖는 경우가 많으니 점심 식사 시간이 늦을 것 같다면 식당에 미리 연락해야 한다. 11코스 시작점에서 2km 지점 동일리 마을까지는 중간마다 해안 길을 만나 바다의 정취를 간간이 즐길 수 있으나 나머지 구간은 내륙으로 향하게 된다. 모슬봉에 짧은 숲길과 정난주 마리아 성지를 제외하고 신평 사거리까지 햇빛을 막아줄 만한 쉼터가 없고 대부분이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라 발도 피곤하고 지치기 쉬우니 적당히 쉬며 체력관리를 해야 한다. 모슬봉 정상까지 시각장애인 기준 트레킹 난이도는 '중하'이나, 하산 시 중간 스탬프 근처 숲길의 계단이 불규칙하고 난간이 없어 위험하다(등산 경험이 있는 시각장애인 기준이며 보행 시 안내자가 동반할 경우임). 제주는 바람이 불어 시원한 날에도 1도 화상을 입을 정도로 피부가 타는 경우가 많다. 햇살이 좋은 날에는 선크림, 스카프, 팔 토시 등을 꼭 챙겨야 한다. 특히 반바지보다 긴바지 입기를 권유한다. 오름, 농로, 곶자왈이 모두 있는 11코스에는 가시덩굴, 잡초, 해충들로 인해 노출된 피부가 상하기 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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