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헤어졌던 순간에는... 25화

약간 피폐한 로맨스 소설

by 맑고 투명한 날

"그래. 엄마 말이 맞아. 너도 이리 와서 앉아."


평소와 너무 다른 분위기다.

난 조심스럽게 소파로 가 앉았다.


주위는 온통 짙은 안개 때문에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내가 앉은 소파 주위만 보인다.


"난 이미 마음을 굳혔어. 그러니까, 너도 고집 그만 부리고 이제 각자 살자."

"넌 애도 하나 낳지 못하는 그년이 그렇게 좋냐?"

"야, 너 말을 자꾸 그딴 식으로 하지 마. 다 너 때문에 그런 거잖아."


뭐?

작은 엄마가 애를 낳지 못하는 게 엄마 때문이라고?

아버지의 말은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그래 내가 그랬다. 됐냐? 어디서 그딴 병신 년한테 정신이 홀딱 빠져선... 솔직히 말해. 내가 그년보다 얼굴이 못하니 아니면 몸매가 부족해? 그건 너도 솔직히 인정하는 거잖아."

"애도 있는데... 흠흠흠."


엄마의 막말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단지 전과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굉장히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는 정도.

보통 이 정도면 눈이 풀려야 정상인데... 너무 이상하다.


엄마가 화를 낼 때는 엄청난 화산이 폭발하듯 하는데

지금은 너무나 차갑고 냉철한 모습이다.


하지만 거친 말은 변함이 없고 굉장히 냉소적이다.


"내가 왜 너랑 별거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할 마음도 없고.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민정이하고 한다는 건 더더욱 인정 못해."

"그딴 식으로 고집부리지 말고... 그냥 별거만 하자는 거야. 혹시 아니 나중에라도 우리가 다시 합치게 될지."

"놀고 있네. 너 그딴 식으로 민정이도 꼬셨니?"

"그만하라니까... 흠흠흠..."


엄마는 항상 이런 식으로 아빠를 무시했다.

언제나 그랬지만 나이도 아버지보다 한참 어린데도 아버지를 계속 무시한다.


내가 나중에 아버지와 엄마의 나이를 알고 놀란 건.

평소 아버지와 엄마의 나이가 같거나 그렇지 않다면 아주 조금만 차이가 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와 엄마의 나이는 제법 차이가 많이 났다.


그런데 엄마는 항상 아버지에게 지나칠 정도로 막 대했다.

난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아버지의 바람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 그렇겠지.

그러니까 엄마가 저렇게 아버지를 무시하고 막말을 하는 거겠지.


단 한 번도 나나 아버지에게 미소를 보여준 적이 없던 엄마.

다른 사람에게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지만.

아버지에게는... 특히나 나에게는 절대 미소를 짓지 않던 엄마다.


"야!"


차갑고 냉소적이기만 하던 엄마가 갑자기 예전처럼 불렀다.


"예..."

"넌 지금 이 상황이 맞다고 생각하니? 똑똑히 보라고! 니 아빠란 인간이 이렇게 멀쩡하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 엄마를 버리고 새 여자를 만나 새살림을 차리겠다는데, 넌 내 아들인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평소에는 계속해서 날 저주하며 빨리 죽어버리라고만 하던 엄마가

갑자기 지금은 날 자기 아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그게 갑자기 너무 무섭다.


왜냐고? 엄마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니까.

맞다. 제정신이라면 절대 저렇게 행동하고 말하지 않겠지.


제정신이 아닌 사람은 미친 거고.

미친 사람의 행동은 예측하기 힘들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엄마는 그걸 핑계 삼아 날 힘들게 하겠지.


"전..."


난 슬쩍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이딴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지 말라고 말렸을 텐데...


아버지도 엄마가 한 질문의 답이 궁금했는지 가만있었다.


"두 분이... 잘 상의해서 결정했으면 좋겠어요."


난 솔직하게 말했다.

어차피 두 사람 다 내 말을 들을 것도 아니고.

내 대답이 뭐가 되었든 엄마는 계속해서 화를 낼 것이고.

그 화를 받아 아버지도 화를 낼 것이다.

그렇게 하루 종일 분란은 멈추지 않고 계속될테지.


그런데 왜 이렇게 우리 가족 주위가 전부 짙은 안개가 껴 있을까?

집에 불이라도 난 건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응?"


아버지의 황당한 표정.


"뭐라고... 이 새끼가 뭘 잘못 처먹었나?"


그것보다 더 황당한 표정을 짓는 엄마.


"솔직히 말해서... 전 아버지가 작은 엄마랑 같이 사는 거에 그리 큰 관심이 없어요."

"뭐... 뭐라고? 자... 작은 엄마... 너 지금 민정이를 작은 엄마라고 부른 거야?"

"예. 엄마보단 작으니까 작은 엄마지요."

"이 미친... 새끼가..."


엄마는 도끼눈을 뜨고 아버지를 무섭게 노려 보았다.


"아아... 이런 식으로 나오려고 이 새끼를 데려다가 그년한테 과외를 시킨 거구나. 이제야 앞뒤가 딱딱 맞네."

"무슨 헛소리야?"

"헛소리라니? 내 말이 틀렸어. 그 미친년이 너뿐만 아니라 내 아들까지 이렇게 구워삶은 거잖아. 두 새끼 다 꼴에 남자라고... 어휴 병신들!!!"

"야! 너 남편한테 병신이 뭐야 병신이?!!"


언제나 패턴은 똑같았다.

오늘은 엄마가 처음에 굉장히 침착하게 말을 해서 혹시나 했지만.

이런 개싸움으로 진행되는 건 똑같았다.


"하긴 더러운 아비의 피를 이어받은 이 새끼도 똑같아. 어떻게 된 게 이 집구석에는 내 편이 하나도 없어. 하나도!"

"지금처럼 계속해서 막말만 하는데 누가 너 편을 들어!!!"

"이 놈의 집구석 그냥 확 망해버려라. 그냥 망해버려야 해!"


갑자기 엄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더니 주위를 둘러싼 짙은 안개에서 갑자기 나타난 부엌으로 가더니 가스 중간 밸브를 돌리고 가스불을 켜려고 시도했다.


틱... 틱...


하지만 이상하게 가스불은 붙지 않았다.


"야, 너 미쳤어? 왜 이래?!!"


아버지가 참지 못하고 엄마에게 달려가 두 팔을 잡았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이놈의 집구석을 확 불 찔러 버릴 거니까. 그래서 너랑 저기 있는 악마 새끼 전부 불에 태워 죽일 거야. 그러니까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어서 놔!!!"


엄마는 미친 듯이 폭주했다.


짝...


그런데 갑자기 뺨을 때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바닥에 쓰러진 엄마는 뺨을 부여잡고 아버지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너... 너... 지금 날 때린 거야... 날 때린 거냐고?!! 흐흑... 흑흑흑..."


내 기억 속에선 아버지나 엄마가 서로를 때리거나 날 때렸던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아버지가 엄마의 폭주를 막기 위해 처음으로 손찌검을 한 것이다.


"내가 이래서 너랑 같이 못살겠다는 거야. 민정이는 자기가 낳은 자식도 아닌데 데려다 공부까지 시키는데. 넌 성근이 친엄마라는 여자가 이렇게 행동해도 되는 거야. 되는 거냐고?"

"그년은 치과 의사잖아."

"야! 박희선. 정신 차려! 너 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러냐고!!!"

"그걸 몰라서 물어?!!"


엄마는 바닥에서 순간적으로 일어섰다.


"저기... 저기 있는 저 새끼가 태어나면... 날 행복하게 해 준다고 했잖아. 이 세상 그 어떤 여자보다 더 행복하게 해 준다고 내게 약속했잖아. 그 약속을 깬 사람이 누구야, 누구냐고? 바로 너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너 내가 저 새끼 낳다가 죽다 살아났을 때. 넌 내 손을 잡아 주는 대신... 민정이 그 미친년이랑 같이 있었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그게 아니라고... 그때 민정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아버지는 말을 하다 말고 날 바라보았다.


"그년 죽는 건 그렇게 걱정이 되면서... 하혈을 하도 많이 해서 사경을 헤매는 내 걱정은 안 됐냐고?"

"미... 미안해. 그땐 정말... 미안하게 되었어."

"너 분명히 내게 그랬어. 아들만 낳으면 날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그 잘난 입으로 했어 안 했어?!!"

"해... 했지..."

"그래서 내가 니 아들 낳아 줬잖아. 그런데 넌 왜 약속을 안 지켜. 넌 그 입으로 분명 약속했잖아. 그런데 왜 자꾸 민정이를 우리 사이에 끼어들게 하냐고 왜? 왜? 왜에에에???"


엄마는 아버지 품에 안겨 또다시 울기 시작했다.


"나랑 행복해야지... 왜 자꾸 그 미친년이 우리 사이에 끼어드는 건데... 왜... 왜..."

"미... 미안해..."

"난 약속을 지켰는데... 넌 왜 나랑 한 약속을 안 지키는 거냐고? 왜... 왜!!!"

"희선아... 미안해... 미안해..."


난 고개를 숙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솔직히 말해.

난 두 사람의 지금 대화가 하나도 공감되지 않고 이해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뭔가 속에서 울컥하고 자꾸 눈물이 흐른다.


당장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엄마였는데...

솔직히 어떨 때는 저런 미친 엄마와 같이 사는 아버지가 불쌍해 보이기도 했는데...


모르겠다.

진짜 모르겠다.


난 소파에서 일어나 천천히 내 방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방문 앞에 멈춰서 습관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주위를 둘러싼 짙은 안개 때문인지

아버지도 엄마도 소파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몸을 돌려 방문을 잡으려는데 방문 손잡이가 보이지 않는다.


"어라... 이게 뭐야?"


아무것도 없다.

정말 아무것도... 온통 주위를 둘러싼 짙은 안개.

그것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때였다.


화르르륵...


갑자기 불이 나고 짙은 안개는 온통 불로 변해있었다.

내 몸에도 불이 옮겨 붙었다.

그리고 점점 뜨거워진다.


"아악... 아아... 아아악..."


내 몸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난 뜨겁다...


이러면 난 죽는 건가...

안되는데... 난 지금 죽을 수 없다.


죽으면 안 된다고...


"안돼...!!!"


난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헉... 헉... 헉..."


샤워를 막 마친 것처럼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부모로부터 독립해 살고 있는 내 방이다.


시계를 보니 오전 5시 57분.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니 지금은 조금 빨리 일어난 것이다.


"악몽이구나..."


난 잠이 덜 깬 몽롱한 상태도 빨리 벗어나고

악몽의 여운을 빨리 쫓아내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가 담배를 피웠다.


"후우..."


담배연기를 내뿜는데

새벽이라 그런지 바람이 쌀쌀하다.


뭔가 나에 대한 예지몽 같기도 한데

왜 이런 꿈을 꾸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다음에 생각하고

우선 먹고살아야 하니까.

지금은 내 일터로 갈 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게 내가 일하는 곳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6시 40분.

언제나 그렇지만 나보다 더 빨리 출근한 사람이 있다.


"최대리 지금 왔냐?"

"예. 과장님."

"담배 하나 필래?"

"그러시죠."


우린 담배를 피우기 위해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26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