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세베리아 같은 놈
요즘 MBTI가 예전의 혈액형론을 완전히 대체했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MBTI에 대한 얘기가 꼭 나오고, 상대방의 MBTI를 추측하는 말들도 오간다. 특히 사람들에게 극명하게 갈리는 것이 E 타입(외향형)과 I 타입(내향형)이다. 바깥을 향하느냐, 내면을 향하느냐가 인간무리를 나누는 가장 큰 카테고리인 모양이다.
미리 말하자면 나는 ENFP이다. 앞에 E가 붙었으니 마땅히 사교와 바깥을 좋아하고 친구가 많아야 할 것 같지만, 나는 친구가 많이 없다. 마음에 아무런 꺼리낌 없이 기뻐하며 만날 수 있는 친구는 한 손에 꼽는 지경이다. 친구가 많이 없으니 당연히 친구들끼리의 모임도 자주 하는 편은 아니다. 친한 친구들과 있으면 굉장히 활발하고 심지어 진취적인 면모까지 띄기 때문에 이럴 때 보면 E가 맞긴 맞는가 싶다.
나는 육체의 체력도 저질이지만 사교를 할 수 있는 체력은 그거보다 훨씬 낮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다가도 중간에 10분이라도 잠시 쉬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주로 화장실에 가서 숨을 돌리곤 한다)
다행히 절친한 친구들은 나와 비슷한 성향들을 가져서 함께 있으면서도 가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리 속의 혼자를 즐긴다. 핸드폰을 각자 붙잡고 서로를 향한 집중을 잠시 내려놓는 것이다. 집에서 만나는 경우에는 책을 보거나 다른 방에 가서 한숨 때리기도 한다. 한때는 모임에서 대화가 끊기는 순간을 견딜 수 없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시간이 있어야 편안하다고 느낀다.
이런 나와 상극인 사람이 연락을 자주 하는 사람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잠시도 쉬지 않고 나의 모든 것을 공유하려 하는 사람, 방금 만나고 왔는데 톡으로 대화를 더 이어가려는 사람.
가끔은 내가 이런 사람이 될 때도 있다. 나는 친구 모호연과 같이 살고 있는데 모호연은 나보다 훨씬 더 내향적이고 혼자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어떻게 그런 사람 둘이 같이 살 수 있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우리는 각자의 영역에서 주로 활동하며 같이 있는 시간보다 따로 있는 시간이 훨씬 많다) 워낙 쿵짝이 잘 맞는 친구인지라 얘기를 한번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데 그러다보면 서서히 얼굴이 어두워지는 모호연을 볼 수 있다. 예전에는 이런 눈치가 없었어서 한번 신이 나면 미래의 할 것, 어제 생각한 것, 어제 꾼 꿈 얘기, 트위터에서 본 것 등을 갑자기 와르르 쏟아내곤 했는데 이젠 눈치가 늘어서 자제가 가능하다. 물론 그럴 때 솔직하게 "이다야, 우리 잠시 얘기 하지 말고 말없이 가자"라고 말해준 모호연 덕분이다.
사교체력은 상대적이라 절대적인 기준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사교체력이 더 낮아지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나의 사교체력을 극상으로 끌어올리기도 한다. 산세베리아가 환경에 따라 자신을 최대한 맞춰보는 것처럼 말이다. 산세베리아는 급격한 변화만 주지 않으면, 충분한 시간만 준다면 어떻게든 적응을 해낸다.
이런 산세베리아 같은 놈과 친구로 계속 있어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또한 몇 년 째 물 속에서 별다른 반항도 없이 버텨주고 있는 진짜 산세베리아에게도 감사를 보낸다.
(다음 화에 계속)
#초록친구 #에세이 #산세베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