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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Apr 13. 2022

초록친구(6)

행운은 행운초의 몫 





20대 초반부터 30대 중반까지, 나는 그림과 홈페이지에서 힘들고 슬프고 괴롭다고 온 동네방네 난리를 쳤지만 실제 내 생활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그런 것을 터놓지 않았다. 오히려 고민을 토로하는 사람이나 우울해하는 친구를 보살폈다. 잠도 안 자고 채팅으로 끝없이 푸념을 들어주는가하면, 내가 할 수 있는게 있다면 최선을 다해 돕기도 했다. 아는 사람들은 나에게 착하다고 했지만, 나는 그것이 착한 것이라고 하기엔 어렵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의 어려움을 들어주고, 위로하는 데에서 나의 쓸모를 느꼈기 때문이다. 고맙다, 너뿐이다, 이렇게 날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황홀했고 더욱 열심히 구원자 노릇에 박차를 가했다. 심지어 연애 생활도 비슷해서 만나는 남자마다 이해해주고 보살펴주려고 그렇게 애를 썼다. 너는 마치 엄마같다는 말을 듣고 행복해했던 나라니. 에효.


그때는 감정쓰레기통이라는 말이, 빨대 꽂는다는 표현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과 이 행위를 '양치기'라고 불렀다. 나는 목자고, 어린양을 보살핀다. (뭐지, 이 교만함은!) 아니, 보살피는 정도가 아니라 어린양이 없으면 적극적으로 찾는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이 불행한 사람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그가 나를 의지하면 스스로 쓸모를 느끼고 그것으로 안심한다. 


구원자 컴플렉스의 몹쓸 점은 결국 그 사람과 연애를 하지 않을 바엔, 가족이 되어주지 않을 바에는 결국 파국으로 끝이 난다는 점이다. 그렇게 성심성의껏 위로해주던 사람들과 영원히 좋은 친구가 되었으면 얼마나 해피엔딩인가.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한번 감정쓰레기통이 되고 나면 그 노릇에서 벗어나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 나에게 주어진 의무처럼 그들의 모든 말을 들어줘야하고, 모든 어려움을 신경써주어야했다. 그들이 내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시늉이라도 했다면 나는 아직까지 감정쓰레기통으로 남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 쓰레기통의 말을 듣지 않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점점 더 불행을 향해 나아갔다. 그런 것을 몇 달, 또는 몇 년 겪고 나면 결국 나가떨어져 그들과 다시는 연락하지 않게 되었다. 


일방적인 관계는 덧없는 것이다. 나를 쓰레기통 취급하는 이가 나에게 좋은 친구로 남을 리가 없다. 길에서 주워온 행운목조차 나에게 기쁨과 위안을 주는데, 차라리 식물에게 마음을 쏟는 편이 나을 지경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어린양을 찾지 않는다. 감정쓰레기통 노릇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쓰레기통 노릇을 하던 비슷한 성향의 친구들을 만났다. 그들과는 서로 돌보아주는 것이 가능했다. 이제 나는 목자이면서, 어린양이기도 하다. 나의 쓸모는 나를 가치있게 여겨주는 친구들에게만 의미있는 것이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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