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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7일, 28일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94번째

by 온호

8월 27일 화요일


별일 없었나 보다. 근무는 7시간 30분 했다고 출근부에 기록되어 있고 사진첩에도 밥 먹은 사진 밖에 없다. 천 원의 조식, 출근 30분 늦게 하고 먹고 간 떡국과 점심시간에 학식으로 나온 투움바 파스타.

8월 28일 수요일


면목종합사회복지관 3층에서 비폭력대화 수업이 있었다. 10시부터 12시까지. 이 날은 방에서 일찌감치 출발해서 복지관에 40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지난주에는 9시에 천 원의 조식을 먹고 출발했더니 너무 10시에 도착했고 그게 싫어서 이번 주에는 이렇게 했다.

가방에 넣어온 머그컵과 커피백으로 정수기에서 온수를 받아 커피를 만들고, 기숙사 편의점에서 사서 가방에 넣어온 샌드위치와 함께 아침으로 먹었다. 모임이 시작되기 전 복지관에서 간식으로 샌드위치를 줘서 커피를 재탕해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두 번씩 먹었다. 그러면서 노트북으로 글을 계속 썼다.


40분이나 먼저 도착하려고 한 동기에는 요즘 약속시간에 1분 단위로 딱 맞춰 도착하는 일에 스트레스를 느꼈기 때문만은 아니다. 룸메가 있으니까 방에서 빨리 나오는 것도 있고, 복지관 공간에서 노트북으로 글을 좀 쓰고 싶어서도 있다. 그리고 룸메가 있으니까 혼자 있을 때보다 아침에 20분 정도 덜 밍기적거리고 부지런하게 움직이게 되는 부분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아무래도 성실한 인간으로 보여지고 싶은 욕구 때문일텐데, 이건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인 것 같다. 나한테서 떼낼 수 있는 성질이 아닌 것 같다. 나는 평소에도 다른 사람에게 인식된다는 것에서 큰 동기를 부여받는다.


실제로 현실에서 타인에게 인식되고 있는지도 영향을 끼치지만, 그냥 타인의 존재가 내 머릿속에 들어있기만 해도 그렇게 된다. 주로 그 사람이 나를 지켜본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더 떳떳한가라는 식으로 작동한다. 내가 더 나은, 좋은 사람이 되려는 것은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사람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이래요, 나는 그래요." 하고 얘기할 때, 그것들이 거짓이 아니기 위해서는 내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 또, 내 머릿속 타인은 정말 타인일 때도 많지만 대부분은 나다.


반면에 어떤 부분에서는 룸메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 신경을 덜 쓰고 있다는 것도 느낀다. 신경을 덜 "쓴다"는 표현은 조금 아쉽고 그냥 자동적으로 덜 "쓰인다." 첫 룸메와 두 번째 룸메와는 어떤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번 룸메에게는 '딱히 안 그래도 되잖아?' 하는 느낌이 들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이것이 퇴행인지 성장인지, 적응인지, 그냥 나이 먹으면서 타성에 젖어 식어가는 어른이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기숙사 행정실에서 그나마 나이가 비슷한 사람끼리 매칭시킨다는 게 사실로 밝혀졌기 때문에 이 룸메에게 앞선 두 룸메와 같은 어떤 사연이 있을 수도 있지만 딱히 그래 보이진 않는다. 막학기라고 했으니까 입사생 중에 최대한의 학년과 매칭되긴 했다.


복지관.

비폭력대화라는 것이 단순히 "좋은 대화법"이 아니라 생각보다 굉장히 깊이 있는 것이라는 걸 느꼈다. 수업이 예상치도 못하게, 95년생이 말해주는 "박스 밖"이나 "OVERRIDE" 같은 개념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케팅 강의에서 배웠던 소비자의 이상 상태를 높여 현재 상태와의 간극을 발생시키는 마케팅의 기본 원리가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도 수업에 등장했다.


강사님이 머핀 두 개를 가방에서 꺼내 복지관에서 제공한 샌드위치 쟁반 위에 올려놓으시면서 "드실 분 드시라."고 했던 것의 영향으로 수업에 과하게 감동한 것이라면 내가 살짝 좀 무서워질 것 같다. 그건 아니겠지? 사람이 8명이었는데 2개 있는 머핀 중 당돌하게도 당근 머핀을 쟁취하는 나를 보면서 다른 유인이라면 절대 이런 행동은 하지 않을 텐데 빵, 쿠키가 나에게 대단하긴 한가보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더 의심이 된다.


수업이 끝나고 자조모임에 속한 청년과 지난주에 못 갔던 돈까스 집에 갔다. 지난주에는 돈까스 집을 못 가서 중국집을 갔었던 것이다. 돈까스 집 홀에 자리가 없었다. 이 가게는 청년이 집에서 가끔 배달시켜 먹은 돈까스 가게인데 아무래도 배달시키면 상태가 최상은 아니기 때문에 매장에서 먹어보고 싶었다는 의사를 내비쳤었다.


식사 끝나고는 대각선 횡단보도를 건너서 메가커피에 갔다. 노트북을 꺼내서 쓰던 글을 마저 쓰려고 했는데 한 시간 넘는 시간 동안 세 줄정도 쓴 것 같다. 사람이랑 얘기할 때는 핸드폰도 안 보려고 하는 내가 성미에 맞지도 않는 일을 하려니 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밀린 걸 빨리 쓰고 싶은 마음이 컸나 보다. 상대 청년도 너무 말씀을 많이 하시긴 했다.


출발시간에 되어서 청년과 함께 자조모임에 합류했다. 국립 중앙 도서관의 삼엄한 보안을 실감하면서 일일 출입증을 발급받았다. 다른 청년들을 기다리던 "작가와의 대화" 라는 공간에서 유사 인생네컷을 찍었다. 이상의 여인이었던 금홍과 개성 거리에서라는 컨셉을 만들어서 찍었다. 사진이 잘 나왔으면 해서 금홍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바라보면서 웃어보았다. 결과가 마음에 든다.


인원이 다 모여서 도서관을 두 시간 정도 구경했다. 북한자료실에서는 사진은 찍을 수 없었지만 로동신문의 가독성은 굉장히 좋다라는 점이나 북한판의좋은 형제』책을 펼쳤을 때 났던 냄새가 초콜릿 냄새 같았던 점이 인상 깊었다.


잡지열람실을 구경하다가 생각해 볼 만한 것도 발견했다. A.I를 활용한 설교문 작성에 대한 글이 있었다. 대충 읽어보면서 '영성과 관련된 것도 A.I한테 맡긴다면 인간은 어디로 가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인공지능의 영성에 대한 정의나 인공지능이 영성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냐 마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것까지 맡겨버린다니?'의 느낌이었다. 웃겼다. 따지자면 나는 인공지능이 영성을 가지는 것은 이미 실현됐다고 본다.


도서관을 나와서 몽마르트공원으로 갔다. 몽마르트공원과 서리풀공원을 잇는 누에다리 위에서 본 서울의 모습을 찍었다. 막대 아이스크림같이 생긴 귀여운 가로수가 무색하게 도로는 고지혈증이나 동맥경화 같은 단어를 떠오르게 했다.


공원에서 두 명이 더 합류했고 그중 한 명과 헤어질 때 그동안 고민했던 사안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의견을 들어보려 했다. "이런 경우에 내 마음은 이러이러합니다. 당신은 내가 내 욕구에 따라 당신한테 이렇게 하자고 한다면 어떨 것 같나요?"라는 내용의 말을 했다고 생각한다. 어렵게 결단을 내려 물어본 것 치고는 이전과 비슷하게 모호성이 있는 답을 받았다. 내가 전달을 명확하게 못해서 일 수도 있고 상대방이 고민이나 곤란함으로 인해 의도적으로 피했을 수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것 보다도 나는 저 말을 한 것이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점에서 자괴감을 좀 느꼈다. 나이는 많이 먹었는데 친구관계에서 어떻게 해야 좋은지도 모르는 어른이라는 것에서 내가 너무 못나보였다.

그런 것 치고는 호프집에서 저녁을 먹을 때는 굉장히 재밌었다. 특별했다. 오랜만에 어릴 때 친구들이랑 술 마시던 느낌이 났다. 자조모임에서는 그러는 일이 없었는데 우리들은 술을 꽤 많이 마셨다. 맥주와 소맥은 맛있었고 청년들은 졸거나 귀여워지는 등 사람이 취기가 올라왔을 때 보이는 건전한 행동들을 처음으로 보여줬다. 나는 소맥을 연거푸 마시면서 취기가 올랐다가 술을 마시는 속도가 느려지자 다시 내려간 취기 덕에 그 정겨운 모습을 온전히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자 마음 한켠이 따뜻하고 포근했다.


더 놀고 싶어 하는 청년에게 서운해하지 말라고 당부하며 먼저 집으로 향하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유치원 근무가 이틀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도 자정 근처에서 자려면 아쉽지만 가야 했다. 기숙사 방에 도착했더니 룸메는 외박을 하는지 방에 없었다. 덕분에 샤워도 편하게 하고 12시 조금 넘어서 잤다. 버스정류장에서 용단을 내리고 조금 더 일찍 귀가한 판단때문에 다음날 아침도 지장없이 루틴대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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