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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혈한 날과 유치원에서 마지막으로 일한 날에 한 생각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95번째

by 온호

8월 29일 목요일

전날, 금요일이나 주말인 것 같은 분위기에서 술을 마셨지만 실제로는 수요일이었다. 그래서 절제를 했고, 적당히 마신 술의 기운으로 나른해진 덕분인지 잠을 잘 자고 일어났다. 그리고 스트레칭을 간단하게 하고 침대에서 나와서 양말을 신고 운동용 티셔츠를 입은 후 기숙사 헬스장으로 갔다. 운동을 좀 하고 있으니 여느 때처럼 B(유치원 남자 근로장학생)와, B보다 한 살 형인 B의 룸메이트가 함께 운동을 하러 왔다. B는 자신의 룸메이트에게 운동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러다가 기구가 겹치는 바람에 나는 평소보다 운동을 짧게 하고 나와서 산책을 갔다. 아침에 만큼은 시원한 가을바람이 정말 기분 좋게 불어줬다.

'이러다가 곧 아침바람이 춥게 느껴지겠다.' 시간은 금방 또 흘러버리고 말테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포인트에서 사진을 기록하고 있다. 졸업할 때쯤엔 그것들이 무언가 될지 모른다.

아침을 먹지 않고 9시에 출근했다. 식단을 확인해 보니 조식 메뉴가 별로였던지 근무가 이틀 남았기 때문이었던지 하는 이유 때문이었다. 청소를 하면서 B와 유치원 근로가 마지막 하루를 남겨놓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퇴근을 했다. 평소처럼 기숙사로 함께 올라가지 않고 나는 길을 내려가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헌혈카페에서 24일 토요일부터 헌혈이 가능하다고 문자가 왔었다. '언제 가지?' 하고 있던 중에 수요일에는 내 피(AB형)가 필요하다는 문자가 추가로 왔다. O형이 자주 부족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AB형 전혈 급구라니! 전혈 헌혈밖에 해본 적 없는 AB형인 나에게 딱 맞는 소구였다. 문자를 받는 순간 게임의 미션같이 느껴졌다. [보상x2] 인 데다가 무언가 불이 켜져서 그걸 터치해서 터뜨려야 할 것만 같은 느낌. 그리고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을 내가 제공할 수 있다는 것도 동기가 되었다. 그래서 퇴근을 하고 바로 청량리 헌혈카페로 간 것이다. 저녁 8시까지 한다고 하니 밥을 먹고 가면 늦을 것 같았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헌혈을 왜 하는지 생각했다. 누군가 물어본다면

"요즘 의사, 간호사 파업 이슈라든지 응급실 부족 이슈라든지 병원 쪽으로 이슈가 많잖아요? 아픈 것만 해도 서러운데 혈액까지 부족하면 환자들이 더 불행해지지 않을까요. 도움 될만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좋은 것 같아요." 하고 그럴듯하게 대답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1차적인 동기는 분명히 아니다. 1차적인 동기는 저 문자를 보고도 헌혈을 하지 않는 게 더 힘들기 때문이다. 스무 살 때 회기역에서 나눔이(헌혈의 집 마스코트)가 인쇄된 입간판을 볼 때도 그랬다.

'아.. 헌혈. 누군가는 지금도 피가 필요하겠지.'

'착한 척하지 마, 귀찮아, 너가 안 해도 어차피 많아.' 이 때도 먼저 찾아오는 느낌과 그것에 대응하는 생각이 있었다. 처음 몇 번은 2차적인 생각이 이겨서 그냥 지나쳤지만 입간판을 볼 때마다 느끼는 불편감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나중엔 헌혈을 몇 번 했다.


그리고 14년이 지나서, 최근 새로 사귄 친구의 인스타에서 헌혈과 관련된 글을 본 순간 그때의 내 마음이 다시 떠올랐다. 그렇게 다시 하게 됐다. 오랜 히키코모리 생활로 끊어진 신경을 하나 다시 잇는 수술 같았다. 좋은 계기가 되어준 친구의 존재에도 감사하다. 또 헌혈은 나를 좋은 쪽으로 오해받기 쉽게 해 주니 손해 볼 것도 없다. 거기다가 혈액검사 결과를 받아보는 소소한 재미도 있고, 헌혈이 또 생각보다 조건이 있기 때문에 건강한 사람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입증이 된다.


타이머가 끝나고 일어서서 나가면서 롯데샌드 파인애플맛이 쌓여있는 트롤리를 봤다.

'저거 주는 건 변하지도 않네.' 하는 생각이 들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대기실에서 10분 기다릴 겸 노트북을 꺼냈다. 저녁을 안 먹어서 배가 고팠기 때문에 초코파이 두 개랑 이디야 스페셜 골드블렌드 리치크레마 커피믹스를 먹으면서 창가 자리에 앉아 글을 썼다. 헌혈카페니까 공간을 정말 카페처럼 활용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8시가 30분 정도 남았을 때 직원분이 오셔서 "8시에 문 닫는 거 알고는 있으라"고(뜻은 같지만 실제로는 상냥하고 조심스러운 말투로) 이야기해 줄 때 노트북을 접고 가방을 싸서 일어났다.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나가는데 직원분들도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해주었다. 어렴풋한 인류애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그분들은 그냥 퇴근을 할 때가 다 되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기숙사로 돌아와 밥을 먹고 샤워를 하고, 잊지 않고 루틴인 스픽을 양심껏 했다. 그리고 직접 만든 레몬청으로 차를 한잔 마시면서 하루를 마감했다. 좋은 하루였다.




8월 30일 금요일

국가근로장학생으로서 유치원에 출근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학생식당에 가서 9시에 아침을 먹고 9시 30분에 출근을 했다. 안 먹고 가기에는 메뉴가 너무 괜찮았다. 그리고 내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는데, 9시 30분에 출근을 하는 날이면 담임선생님이 유독 잔심부름을 많이 시키시는 것 같다. 9시에 아이들이 많이 등원하다 보니까 그때 내가 없으면 선생님이 혼자 귀찮은 일을 조금 더 하셔야 하는데 그 여파인가 하고 나는 지레짐작하는 것이다. 아닌 걸 알면서도 밥 먹느라 30분 늦게 출근하는 내가 제 발이 저려서 이런 생각을 종종 하곤 했었다. 이 날도 그랬다.

오전에는 트루먼쇼의 PD인 크리스토프 같은 존재가 혹시 내 삶도 조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운 일이 있었다. 1월에 처음으로 유치원에서 근로를 할 때 했던 일을 우연히 다시 했기 때문이다. 그 일은 아이들 수첩에 주말을 표시하는 스티커를 붙이는 일인데, 한 아이의 수첩에 8월부터 내년 2월까지 주말 스티커 부착이 누락된 것이었다. 선생님께서 다른 날이 아니라 하필 내 마지막 근로날에 그걸 발견하셔서 나에게 붙여달라고 하게 된 조화가 신기했다.


'처음에 이걸 했었지...' 겁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던 첫 순간이 떠오르며 살짝 온몸이 감상에 젖어드는 느낌이 찾아왔다.

'수미상관이 너무 작위적인 것 아니오 PD양반.' 나는 무엇인지 모를 존재에게 물었다.

나를 어떤 감상에 빠뜨리려고 이런 연출을 하는 것인가요. 당신은 신이거나 아니면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는 존재겠지요. 그래도 이건 재밌는 일이네요.


담임선생님이 계속해서 평소보다 궂은일을 많이 시켰다. 무겁거나 더러운 것을 처리하는. 그리고 이 날은 나의 마지막 근무를 편안하게 해 주려는 것인지 쌍둥이를 포함해서 평소보다 다섯 명이 적게 등원했는데, 오히려 그래서 담임선생님은 나를 여유가 없는 다른 반으로 자꾸 보냈다. 조금 서운해지던 중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내가 그런 어처구니도 없는 상상을 떠올렸다는 게 웃겨서 크게 웃어버렸다. 서운하게 만들다가 반전으로 몰래 케이크를 가지고 오는 이벤트에 당한 경험이 인생에 딱 한번 있는데, 그때의 감각이 떠오른 것이다. 나도 참 귀여운 구석이 확실히 있긴 있다.


퇴근 전 B와 같이 교실청소를 돌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B는 자신이 들어가는 6세 반 아이에게서 편지를 받은 것에 엄청 감동했고, 자신이 그만둔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아이가 울음을 터뜨린 것 때문에 아주 큰 감상에 빠져있는 상태였다. 감정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나는 딱히 그런 상태가 아니었고, 열세 살 차이 나는 B의 그런 태도가 조금 귀찮기도 했기 때문에 상대가 들으면 좋아할 만한 진실을 섞은 형식적인 말만 적당히 몇 마디 해주었다. 그래도 진실의 비율이 높았기 때문에 양심이 불편할 정도로 건조한 대답들은 아니었다.


나도 8개월 가까이 일한 유치원을 떠나는 것에서 단순한 마음만 일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B에게 공감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면서 나는 내가 왜 B와 같은 상태에 있지 않는지 생각했다.

1. 매 순간 정말 열심히 했기 때문에 아무런 후회도 미련도 없다. 유치원 일하면서 오염된 옷이 3개도 넘으며 하지 않아도 되는 일도 찾아서 했고, 선생님들이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 보이면 참지 않고 먼저 가서 돕거나,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물어봤다.

2. 몇 차례 겪어봐서 아이들과의 이별이 익숙하다. 올해 초엔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입학 예정인 8세 반에서 일했기 때문에 그때 한번 유치원생들과 이별해 봤고, 집에서는 갓난아기였던 조카와 몇 년을 같이 살다가 헤어진 적도 있다. 아이들은 앞을 향해 갈 것이고 나는 그저 뒤로 추억을 남기면 될 뿐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3. '만났기 때문에 헤어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내 마음은 정리돼서 모여있는 상태였다.


청소가 마무리가 돼 갈 때쯤에는 같은 반 보조교사 선생님이 복도를 건너와 나에게 와서 마지막 인사를 건네셨다. 이 분은 아마 2년제 유아교육 관련 학위를 따자마자 취업을 하신 것 같다고 생각이 되는, 유치원에서 가장 어린 선생님이시다. 마지막이어서 그런지 평소엔 묻지 않던 사적인 질문을 하시기도 하고, 내가 한 번도 화내는 걸 본 적이 없다며 "화가 없으세요?"하고 조금 웃긴 질문을 하기도 하셨다.


"아니요.."


난 과거에 완전히 남인 아이를 집어던진 적도 있고, 조카가 버튼만 보면 누르지 않고 못 배기는 발달 시기에 내 방에 와서 게임 중인 내 컴퓨터를 전원 버튼을 눌렀을 때 그대로 뛰쳐나가서 누나에게 조카 좀 보라고 악을 쓰며 코끼리 미끄럼틀을 집어던진 적도 있다. 잠깐 핸드폰 게임의 활성화 상태를 유지하려고 자리를 비운 사이 이제 막 기어 다니기 시작한 둘째 조카가 현관을 나가 계단 낭떠러지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것을 안아 올린 적도 있다. 조카한테 딸기셰이크를 만들어주다가 누나가 믹서기 결합을 제대로 안 해놓은 것에 화가 나서 두세 살 된 조카 앞에서 그대로 딸기와 우유가 들어있는 믹서기를 바닥에 내동댕이 친 적도 있다. 조카들이 컸을 때도 너무 말을 안 들어서 감정적으로 대했던 날이 있다.


"전 조카 키우고 돌보면서 화를 내보고, 후회해 보고, 괴로워해봐서요.."


대답을 하는 짧은 사이에 나 자신이 너무 쓰레기 같은 인간이어서 죽고 싶게 만들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랬다. 나는 내가 저런 일들을 저질렀다는 것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다. 나는 아이들한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봐야 소용도 없고 그 모든 순간들이 지나간 후에는 결국 내가 그것들을 후회하면서 괴로워하게 될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유치원에서(물론 욱할 때가 있었지만) 짜증을 낸 적이 없다.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뺨을 때리거나 뒤에서 머리끄댕이를 잡아당기거나 고집불통으로 "싫어요!" 하고 말하는 소리를 들을 때는 자식을 배 아파 낳은 엄마도 욱하지 않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어서 평소 못하던 말을 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들 늘 존경했다고 말씀드렸다. 진심을 느끼셨는지 보조교사 선생님의 얼굴에 감동이 차올랐다. 누군가 자신의 헌신을 알아봐 준 것에 대해 살짝 벅차오른듯한 느낌이었다. 저출생과 육아환경의 변화, 유치원 아동학대와 맘충 같은 시대적 흐름 속에서 소명과 사랑으로(보수는 많지 않은 것으로 알기 때문에) 하루하루 분투 중인 선생님들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다른 선생님들은 진작부터 다 알고 계셔서 담임선생님도 아실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보조교사 선생님과 작별을 하고 있으니 담임 선생님이 급하게 오셔서 "마지막이냐고", "다음 주부터 정말 안 오는 거냐."고 호들갑을 떠셨다. 겨울 방학 기간, 1학기 학기 중, 여름방학 기간 총 세 기간을 연속으로 유치원에서 근무한 사람이 자신의 반을 마지막으로 다른 근무지로 떠난다 하니 자신이 너무 힘들게 해서 그런가 생각하시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아이, 그런 거 아니에요. 원래 처음부터 이곳저곳 다양하게 일해보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유치원에서 오래 하게 돼서 이제 다른 데 가는 거예요."


다른 선생님들과 지난 며칠 동안 몇 번이나 했던 이야기를 또 했다. 완전히 사실이었다. 유치원은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시킬 것 같은 곳이어서 첫 순서로 골랐던 것이고 한번 하고 나면 경험 수집의 일환으로서 다른 근무지들을 메뚜기 할 생각이었다. 처음엔 유치원이 교외근무지여서 시급을 더 주는지도 모르고 골랐었고 두 번째 선택할 때가 돼서야 그게 이유였다.


이야기를 하다가 담임선생님은 급하게 1층 교무실에 다녀오시더니 포스트잇에 선물코드를 적어와서 나에게 건네주셨다.


"이게 뭔가요?" 어떻게 쓰는 건지 몰라 내가 물었다.

"선물, 선물" 선생님은 민망하신지 이렇게만 말씀하셨다.


대화를 마치고는 A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같이 하게 된 직원들이 하는 퇴근 전 3층 원장실-1층 교무실 인사 순회를 돌았다. 원장님께도 비슷한 말을 반복하고 내려와서 교무실에서도 마지막으로 한번 더 같은 말을 했다. 선생님들의 표정을 보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 그래도 그동안 나와 이곳 사이에 무언가 많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떤 연결이 느껴졌고 그건 작지 않았다. 아쉬워하는 표정, 응원하는 말, 감사... 심지어 내가 유치원 근무 초반에 "잠시라도 쉬고 있는 꼴을 못 보는"이라고 묘사했던 선생님과도 많이 달라진 관계를 느꼈다. 의도치 않았지만 내가 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가장 먼저 오픈한 분이었고, 선입견이 달라진 건 아니고 한결같이 눈에 걸리기만 하면 뭔가를 시키셨지만 그건 일을 잘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라고 평가를 덧입혔다.


나는 분위기를 조금 밝게 바꾸려고 "4학년이 돼서 다시 올지도 모른다."는 말을 정말 마지막으로 했다. 원감선생님은 그냥 놀러 와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어쩐지 이 부분에서는 조금 진정성이 떨어진다고 느꼈다. 일단 나부터 그랬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준비한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PUSH를 눌러서 유치원 유리 자동문을 열고 나왔다. 눌러야 되니까 수동문인 걸까. 어찌 됐건 유리 너머로 일부러 울상을 지어보이는 옆 반 선생님의 처음 보는 얼굴이 꽤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유치원에서의 근로를 끝맺었다.

나는 여기서 일했었다. 그리고 꽤 잘 해냈던 모양이다. 히키코모리 탈출을 한지 딱 1년이 되는 시점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1년을 살아서 살았다. 큰 실수를 저질러버렸지만 어떠한 수치와 굴욕을 대가로라도 살아만 있을 수 있다면 내 마지막은 찬란한 승리를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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