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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5일, 26일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93번째

by 온호

8월 25일 일요일


일요일은 출구 없는 싸움하는 누나 모처럼 숨통 좀 트라고 아침이랑 점심을 내가 좀 간단하게 차렸다. "차렸다"고 해서 요리를 한 건 아니고 그냥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서 옮긴다거나 절반 남았던 꼬치를 마저 조리한다던가 수저나 밥그릇 놓는다거나 하는 일 정도만 했다. 교회도 같이 갔다 왔다. 조카는 상당히 활달한 남자아이라 예배드릴 때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그래서 누나가 사회적으로 많이 힘들어하는데 누가 한 명 거들면 아무래도 여러모로 수월할 거다. 교회 갔다 와서 점심 먹고 누나가 전날 먹다 남긴 설빙 인절미빙수를 후식으로 먹었다. 난 팥이 있는 팥빙수를 좋아하는데(정말 어쩌다 이런 말을 하도록 만든 걸까 이 세상은) 인절미빙수를 먹으면서 팥이 없는 것을 아쉬워하니 내가 몇 년 전에도 똑같이 얘기했었다고 누나가 살짝 아련해지면서 말해줬다.


누나집에서 조금 쉬었다가 기숙사로 돌아왔다. 누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까지 나와서 배웅을 해줬다. 아파트 주차장 모퉁이를 돌아나갈 때까지 조카를 안고 서서 손을 흔들어줬다. 나는 무심한 남동생답게 뒤돌아서 팔을 짧은 반경으로 몇 번 휘적거려 주고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


기숙사 도착해서 누나 집 근처 마트에서 간식으로 산 벨기에와플 10개 들이 봉지를 뜯어서 마구 먹었다. 가정집에 간 후유증이다. 기숙사에 있을 때는 엄격한 자기 통제가 수월한데, 가정집에 있으면 가정집에 있다는 포근함, 안락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좋아하는 빵을 못 참게 된다. 식사를 너무 푸짐하게 많이 먹는 바람에 누나집에서 못 먹고 도로 기숙사로 가져온 벨기에 와플 열 개를 그래서 이틀 동안 다 먹었다. 구매할 때의 섭취계획은 그냥 날마다 심심할 때 하나씩 먹을 생각이었다. 될 리가 없지. 밀가루 폭식을 못 참은 대가로 왼쪽 뺨에 여드름이 네 개가 올라왔다. 아주 손해 보는 교환이다. 참는 걸 다시 잘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8월 26일 월요일


인류 행복의 총량에 티끌 같은 기여를 한 주말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좀 출근하기 싫은 기분이었지만 잘 참고 평소대로 운동하고 씻고 밥 먹고 출근했다.

이 날 아침은 천 원 학식에 꽤 자주 등판하는 조식 메뉴인 치킨마크니커리였다. 커리를 먹게 되면 칫솔이 누렇게 되는 것이 조금 거슬릴 때도 있다. 그리고 학생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왜 그렇게 땀이 많이 나는지 도브 복숭아 아이스티향 바디워시로 아주 달콤한 샤워를 하고 나온 것이 무색해져서 늘 싫다.

반에서 가장 인기 있는 책이다. 이 날만 네 번을 읽고 애증으로 사진을 찍어놓았다. 멸종위기동물그림책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멸종위기동물은 눈표범이고 두 번째가 자이언트판다인데, 자유놀이 시간의 제한이라든지 아이들 집중력의 제한이라든지 하는 이유로 늘 앞부분만 많이 읽게 되기 때문에 이제는 표지의 판다만 봐도 살짝 지끈거리기에 이르렀다.


퇴근할 때쯤에는 많이 들어간 적 없는 반 선생님께서도 내가 이번 주를 마지막으로 그만둔다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나와 B에게 퇴근 인사를 하면서 "구세주가 가면 우리는..." 이라고 하셨는데 구세주라는 말에 기분이 좋았다. 특히 유치원 근무 초반에는 스스로 머슴, 신데렐라같이 느낄 때가 가끔 있었는데 저런 과감한 표현 하나로 내가 그동안 누군가에게 도움이 됐었구나라는 걸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실감할 수 있었다.


퇴근 후 방에 들어가니 새로운 룸메이트가 책상에 앉아 패드로 뭔가 보고 있었다. 올 것이 온 것이다.


"안녕하세요."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와 진동이 분명히 전달됐을 텐데도 돌아볼 기색이 없었기에 인사를 건넸다.

뒤돌아보는 얼굴의 말끔한 물광 피부와 결연한 다운펌에서 느껴지는 훈남 스멜. '아, 잘생겼다.' 호감이 생성된다. 통성명을 하고, 학년을 묻고, 룸메를 맞이하기 위해 내가 어떤 배려를 했는지 넌지시 어필했다. 대화의 반응으로 보아 내향적인 사람 같았다.


"이따 밤에 들어올 건데 그때 생활과 관련해서 상의할 것이 있으면 더 얘기합시다." 룸메가 한쪽어깨에 백팩을 들쳐메고 현관에서 신발을 툭툭 신으면서 말했다. "얘기" 다음에 "합시다"는 "해요"라고 할지 "할까요"라고 할지 "해봅시다"라고 할지, 뭐가 됐든 순간적으로 고민을 좀 했었는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흔들리면서 나왔다. 귀여웠다. 룸메가 나가고 난 후 긴장이 풀리면서 책상 의자에 털썩 앉았다. 팔걸이에 팔을 다 올려놓고 숨을 좀 고르면서 잠깐 멍하니 있었다. 2,3학년쯤 됐을 줄 알았더니 막학기라고 하는 말에 "그렇게 안보이시는데."라고 넉살 좋게 이야기한 내 자신이 자랑스러워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22시가 조금 넘은 밤에 돌아온 룸메를 보면서 그의 밤의 기준이 생각보다 이른 것에 안심했다. 생활 패턴이 크게 차이나면 정말 힘들다. 상의할 것이 있으면 더 얘기하자고 해놓고 딱히 불편한 것이나 요구사항이 없는지 아무 말 없는 것도 안심이 됐다. 그리고 아무래도 꿀 같던 두 달 동안의 1인실 생활이 끝나고 오랜만에 2인실로서의 복귀 첫날이라 내가 긴장을 했는지 새벽 4시쯤에 깼는데, 그때 들어보니 코도 아주 적당히 인간적으로 곤다.


살았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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