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냥 글 쓰고 있으면 뭐라도 한다는 생각, 마음도 편하고 재밌기도 재밌고 몰입도 되고.
3. 기억하고 싶어서.
4. 취업 루트 뚫으려는 거 하기 싫어서
5. 완벽주의? 흘렸으면 흘린 대로 가던 길 가도 되는데 그게 안 돼서?
쓰고 또 쓰고, 업로드하고 또 업로드하면 이전 글이 묻히기 십상인데 나 왜 이러고 있냐. 묻힐 글들도 하나하나 다 정성 담고 담아 쓴 건데, 하면서도 이러고 있다. 고양이로 어그로 끌어서 조회수 높여보려는 생각을 한 나를 나는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죄의식으로 계산하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많이 발행하자고 생각했다.
8월 23일 금요일
유치원에서 물놀이를 한 날이었다. 선생님들께서 놀이터에 제법 엄청난 장치들을 설치하시고 제대로 즐겼다. 나도 혹시 몰라 갈아입을 옷을 챙겨 오긴 했지만 저번에도 그랬듯이 물에 젖을 놀이를 시키시진 않을 줄 알고 있었다. 배려에서 나온 처분임에도 불구하고 담임선생님께서 다른 일을 부탁하셔서 교실로 가게 됐을 땐 결국 나는 여기 속한 사람은 아님을 분명히 깨달았다.
물놀이가 끝나고 아이들이 낮잠을 잘 동안 담임선생님들과 놀이터 뒷정리를 했다. "선생님, 마무리는 제가 하고 갈게요." 하고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는 물건에서 남은 물을 짜냈다. 세게 잘 짰을 때 물총같이 멀리 뻗는 물줄기를 보면서 '나도 물놀이하네.' 생각했다. 재밌고 외로웠다.
며칠 전, 금요일에 시간이 되는지 묻는 연락이 왔었다. 시간은 안 됐지만 퇴근하고 합류하면 7시쯤 도착하겠다 싶었다. 근데 식사시간을 여쭤봤더니 그렇게 가봤자 같이 식사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종종 근로를 빠지기도 했고, 청소시간에 내가 없으면 B가 혼자서 허리 아프고 외롭게 여러 교실을 청소해야 한다는 것도 미안해서 모임은 빠질까 했다. 잠깐 보려고 굳이 일주일치 지친 금요일에 쉬지도 못하고 가고 싶지 않기도 했다.
불러준 분이 나를 처음 불러준 것이기도 했고 안 지 얼마 안 된 B에게 조금 미안할 행동을 하더라도 훨씬 더 소중한 사람들에게 스스로 미안하지 않게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맞겠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 있을 때. 버스, 지하철도 뜨는 시간 없이 딱딱 맞게 도착해서 아주 기분 좋게 합류지점에 도착했다. 합류지점은 충무로역 하얀집이었다. 유명하다는 복소사(복분자주, 소주, 사이다)를 곁들여서 식사를 했다.
복소사는 내 취향이 아니었던 것 같다. 어린이 감기약의 유치한 과일맛 같이 느껴졌다. 잔뜩 기대하며 반응을 기다리는 호스트에게 실망을 안기고 싶지 않았지만 연기력이 부족했다.
오랜만에 술도 마시면서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으니 복잡한 사람들 사이에서 가졌던 이런저런 제멋대로의 판단이나 진단이 실시간으로 변하는 느낌도 받았다. 변하더니 그냥 사람들에 대해서 아무 느낌, 생각이 안 들기도 하는 순간으로 넘어가면서 굉장히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금요일 퇴근 후 친한 사람들과 잔을 맞추고 적당히 마실만큼만 마시는 이상적인 술자리라니. 정말 평범한 좋은 일상이 아닌가. 괜히 고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뱅이가 유명하다는 을지로에서 골뱅이도 먹었다. 골뱅이를 좋아해 본 적은 없는데 통통하고 맛있었다. 맥주도 같이 마시면서 많이 주워 먹었더니 그릇이 많이 비었을 때쯤에는 너무 배가 불러서 좀 걸었으면 싶었다. 말씀을 드렸더니 청계천과 남산둘레길 중 어딜 갈지 선택을 하게 됐다. 마침 식탁에 수저가 보여서 청계천은 숟가락, 남산둘레길은 젓가락으로 들자고 얘기했다. 우리 자조모임 분들은 행선지를 골라야 할 때 다들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라고 하시는 분들이기 때문에 누군가 의견을 내면 대부분 그렇게 정해졌다. 그리고 의견을 내는 누군가는 나일 때가 많은데 그게 늘 마음이 쓰였다. 원치 않거나 더 원하는 것이 분명히 사람들 머릿속에는 있을 것 같아서다. 그래서 늘 다른 사람의 주장에 영향받지 않고 자기 원하는 것을 즉석(주로 인도 위에서)에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이 때는 수저가 있어서 좋았다. 양자택일의 문제일 때는 왼손, 오른손 거수로 즉석 투표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다음에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청계천에 한 표를 선사했지만 결과는 남산둘레길의 압승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많이 걸으면서 터질 것 같은 배도 소화시키고 좋았다. 밤에 산길을 사람들과 같이 걷는 것, 뭔가 낭만 있었다. 많이 걸었다. 기숙사 방에 도착해서는 씻고 잠을 잤더니 다음 날 수면 점수가 오랜만에 매우 좋음이 나왔다.
8월 24일 토요일
잘 자고 일어난 뒤 기숙사 지하 1층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하고 빨래를 돌렸다. 작년에 기숙사에서 처음 살게 되면서 샀던 부케가르니 2L 세제 두 통을 얼마 전 다 쓰고 소비자행동론 교수님이 시킨 설문조사 때 알게 된 세제를 넣었다. "친환경 세제"라고 하면 세척력이 약할 거라는 편견이라든지, A.I 기술을 활용한 친환경 세제 개발에 대한 소비자 인식 같은 것에 대한 데이터를 모으는 조사 같았다. 구글폼으로 답변을 작성하다 보니 생각보다 제품이 괜찮을 것 같았고 해당 제품에 대한 구매의사가 올라갔다. 그러다 세제를 다 써서 고려상품군에 새로 추가돼 있던 그 제품을 사봤다. 퍼실이었다.
...
연구조사라는 탈을 쓴 새로운 형태의 판촉은 아니었겠지?
세탁기를 돌려놓고 '오늘 뭘 해야 하나 생각했다.'
"override" 니 뭐니 배우고 나선 분명히 거기에 대한 욕구도 있지만, 취준 과정 자체와 취업에 대한 열망 또한 분명히 나의 것으로서 오롯이 존재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방에 있던 시절, 면접보고 당당히 취업하는 꿈을 많이 꿨다.) 한 번은 해보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싶다. 남들 다 뭔가 하니까 불안해서 나도 맹렬히 무언가 준비해야 될 것 같다는 심리에 대해서는 경계하면서 공기업, 구체적으로는 산림청 쪽으로 취준을 해보려고 한다. 근데 막상 시작하려니까 도무지 첫걸음이 안 떼 진다.
도망을 좀 친 거 같다. 마침 누나한테 빌려줬던 노트북 가방에서 누나가 애타게 찾던 누나의 유선 이어폰과 애플워치 충전기가 완벽한 명분이 되어주었다.
'갖다 주러 가야겠다.' 는 생각이 든 이후로는 모든 사고가 질서 정연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1. 새로 산다더니 아직 샀다는 말이 없는 걸 보니 안 샀나 보다, 빨리 가야겠다.
2. 가족 단톡방에 연달아 올라오는 어디에라도 기대고 싶어 하는 누나의 감정이 엿보이는 메시지들에 대한 집중도 향상.
세탁기에서 꺼낸 빨래를 건조기에 돌리고 다시 건조기에서 꺼내서 방 침대 위에 모두 던져놓고 싸놓은 가방을 들고 출발했다. 가방에는 이틀 전 병에 다 넣지 못해서 지퍼백에 소분한 레몬청귤혼합청도 조금 있었다. 지하철은 한 역만에 앉을자리가 난 덕분에 한 시간 동안 편하게 이동했다. 언제나처럼 웹툰을 보고 싶은 욕구와 싸우면서 기사를 본다던지, 노래를 듣는다던지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마을버스에 탔을 때쯤 누나에게 내 위치를 알렸다. 허술한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가서 주방에서 아이깨끗해로 손을 씻었다. 자다가 (아마 빈 속에 먹은 항생제 때문인지) 토를 하고 지쳐있는 만 2살 조카를 방에 들어가지 않고 그대로 식탁 앞에서 나와보라고 불렀다. 레몬차를 따뜻하게 먹이면 뭐가 됐든 좋은 기분이 들지 않을까 싶어서였는데 다행히 통했다. 병든 병아리가 활력을 찾은 느낌. 조카는 내가 왔다는 걸 누나가 말해줬을 때 이미 아파서 누워있다가 씨익 웃었다고 하는데 그런 걸 보면 나란 존재가 이미 인간 비타ㅁ
물 먹는 병아리마냥 컵을 양손으로 천장을 향해 쳐들고 남은 차를 야무지게 다 마신 조카를 내가 잠깐 보고 있을 동안 누나는 하던 방정리를 마저 했다. 어떤 심경의 변화나 계기라도 있었는지 누나네 집은 거실 일부와 책상 방에서 나름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여전히 '왜 이렇게 체계 없이 사나.' 싶은 부분이 한둘이 아니지만 아주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변화였다고 생각한다.
이 집안 꼬망탱이가 늘 감기를 달고 사는 데는 관리의 영향이 있다는 인상을 올 때마다 받는다. 자고 일어났을 때도 그렇고 에어컨을 하루종일 틀 때도 그렇고 방 환기를 안 시킨다. 방 커튼도 걷지 않는다. 환기나 채광을 잘 시켰을 때 공기질, 이불 표면의 습기 차이를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것들이 중요하다 생각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귀찮은 것이거나 그렇게 하지 않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뭔지는 모른다. 몇 번 전에 다녀갔을 때도 환기시키고 이불 같은 거 볕 쪼이라고 하긴 했었다.
누나가 방정리를 마무리하고 나왔을 때 나는 마트에 갔다. 올 때마다 밥을 잘 먹는 건 좋은 일이지만 내가 은연중에 가정식을 바라고 오는 것 같다는 스스로의 의혹으로부터 떳떳하고 싶어서였다. 닭꼬치와 샐러드, 그리고 내 간식을 싸게 좀 사서 돌아오니 매형이 퇴근을 해서 와계셨다.
가스레인지 앞에서 매형이 거슬린다고 누나보고 애 보라고 나오라고 하고(정확한 문장은 이게 아니지만 결국 이 뜻이었다.) 나랑 둘이서 화구 하나씩 맡아서 저녁 준비를 했다. 나는 내가 사 온 데리야끼 닭꼬치를 담당했다. 가족들이랑 본가에서 식사할 때도 내가 몇 번 골랐던 제품이어서 조리가 익숙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조카도 분명히 환장할 줄 알았다. 그리고 자른 꼬치고기로 채운 식판 한 칸을 두어 번 비우고 꼬치 채로 들고 하나를 다 먹는 것을 보니 흐뭇했다. 잘 골랐다.
힘들고 지쳐서 불안정했던 누나에게도 안정이 찾아왔고, 아파서 종일 칭얼거렸다던 조카도 내가 와서 잘 지내다가 10시 전에는 잤던 것 같다. 엄마랑만 있으면 아이는 아무래도 그렇다. 너무 가까울 때, 늘 같이 있을 때는 아이뿐만 아니라 사람이 다 그런 것 같다.
나도 그랬다.
24일 아침, 운동 후 산책하면서 본 분수. 시원한 물소리가 들려서 갔다. 작동 중인 분수는 처음 본 것 같았고 굉장히 기분이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