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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2일 목요일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91번째

by 온호

목요일 전반전


하늘 색깔이 아주 여러 번 바뀌었던 날.

오전에 면목종합사회 복지관(서울시 은둔고립청년 지원사업에서 배정받은 권역이다.)에서 비폭력대화를 배우는 모임이 있었다. 돈을 벌고 싶기 때문에 웬만한 활동은 불참하고 있지만 학기가 시작되면 고립은둔청년 프로그램에 수업을 째고 가는 것은 불가능하니 방학일 때 근무를 째고 한두 번 정도는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10시까지 복지관에 가야 했는데 학교에서 제공하는 천 원 조식은 9시에 급식을 시작한다. 밥을 급하게 먹고 가고 싶진 않아서 미리 가서 9시를 기다렸다. 그래서 "총 인식개수 1", 첫 번째로 QR코드를 찍고 밥을 먹었다.


복지관에 10시 정각에 도착했다. 요즘은 어쩐 일인지 자꾸만 이렇게 여유 시간 없이 1~2분 내외로 딱 맞춰 도착하는 일이 많아졌다. 거기에 짜증을 좀 느끼면서도 늦지는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수업은 욕구 이해와 관찰식 말하기가 핵심이었던 것 같고 관찰 말하기는 SBI 말하기(situation, behavior, impact)랑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책상이 더러운 것을 목격했을 때 관찰 말하기로 표현해 보라고 하셔서 나는 "과자부스러기도 있고, 다 마신 지 며칠 된 커피잔도 있다."고 말했다. 강사님은 화이트보드에 내 말을 받아 적으신 후, 두 "도"에 동그라미를 치시면서 이 부분은 주관적인 느낌이 들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난 말하고 나서 과자부스러기나 커피잔이 좀 있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그다지 더럽지 않은 것일 수도 있는 건데 너무 주관적이었나 자평하고 있었는데 그 정도까지 지적당하진 않아서 마음이 놓였었다.


사람은 자신이 자신의 무엇을 신경 쓰는지 말하게 되면 타인의 그것도 신경 쓴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나는 못 참아서 그렇지) 말하는 게 늘 두렵기도 하다.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내가 무얼 무시하는지 내 속내와 밑천이 드러나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이 날 비폭력 대화를 짧게 배우고 피드백도 받아보면서 참 저렇게 여유 있는 신사처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강의에서 만난 자조모임을 같이 하는 청년과 중국집에서 식사를 했다. 각자 간짜장과 쟁반짜장을 먹었다. 식사 끝나고 헤어져서 기숙사로 돌아가는 파란 버스 안에서는 또 다른 청년이 남긴 흔적을 소재로 그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혼자만의 휴식시간을 방해할 것 같아 적당히 하다 말았다.

충고, 조언은 부탁을 받은 경우에만 하기.『돈키호테』에서도 저런 상황을 표현한 문장이 있었는데! 중요하다 정말.

목요일 후반전


오후 6시에는 레몬청 만들기를 하는 일정이 잡혀있었다. 시간 조율할 때 나는 퇴근하고 가고 싶어서 7시로 희망했는데 나머지 두 명이 6시를 희망했다. 난 일 때문에 그런 건데 6시를 희망하신 분은 그냥 일정을 빨리 마치고 싶다는 이유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서운했다. '그래도 평일인데 보통 퇴근 시간 이후로 해주면 좋을 텐데 참 인정 없다.'는 생각도 들고, 수요일 밤에 내가 약속 시간을 재차 확인할 때까지 시간을 정해주지 않다가 전날에 6시로 확정 낸 것도 짜증 났다. 사실 그냥 내가 원한 시간에 안 돼서 짜증이 난 게 크겠지만. 어쨌든 그 바람에 유치원 근무를 못하게 됐으니 돈을 못 버는 것도 손실이었고,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은데 자꾸 뺀질거리는 것 같아진 것도 속상한 일이었다. 정작 당일 오후가 되자 재료 배송 문제로 시간은 7시로 변경됐다. 이때쯤에는 짜증도 나지 않고 그냥 허탈한 감정이 들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이 사람들에게 주도권을 양보하면 안 되겠다는 다짐도 했었다.


'어차피 나 아니어도 세상에 미움이 더 많다. 내가 거기다 한 숟가락 보태봐야 뭐 하겠냐.'

방에서 나가기 전쯤에는 약속장소에서는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서 정신무장차 저런 생각을 했다. 평소 지론이기도 하고 결과적으로 이번 경우에 도움이 많이 됐다. 보통은 자기만 손해 보고 바보처럼 살기 싫으니까 같이 증오하고 복수하기 마련인데 그래가지곤 불행의 총량만 늘어날 뿐이다. 그래서 이론적으로는 나는 저게 맞다고 생각한다. 실천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모르겠고.


약속장소로 이동하는 버스는 만원이라 앞문에서 세 걸음 정도 겨우 들어가서 서있었다. 운전석 바로 옆에 서서 큰 버스 앞창문으로 도로를 보면서 가니 여행 온 것 같았다. 트램을 탄 듯한 느낌. 안 타봤지만.


버스를 내리고 조금 걸어서 도착한 곳은 장안동의 공유주택. 3월에 있었던 동대문구 1인가구 동아리 지원사업 오리엔테이션 때 공유주택에 사는 분이 주방을 쓸 일 있으면 오셔도 된다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우리 베이킹 동아리 총무님이 그쪽에 부탁을 드려서 진짜로 그렇게 됐다. 새로운 주거형태가 그저 신기하고 남일 같았는데 직접 방문해서 목격하니 상당히 좋은 경험이 됐다. 아, 그리고 일정 전에는 호스트 측에도 일정 조율과 수고비 문제로 반감을 가졌었는데 끝나고는 그게 너무 쪽팔렸다. 진짜 등신 같다.


공유주택은 옛날 하숙집 같은 느낌으로 상상한 것과는 달리 실상은 엄청 세련된 공간이었다. 주방도 너무 감성 있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인테리어였다. 그래서인지 세상에 미움을 더해봤자 뭐 하겠냐는 내 다짐과 상관없이 좋은 기분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상자에 담긴 레몬을 봐서 기분은 또 좋아졌다. 레몬을 씻으면서 레몬 냄새가 올라올 때도 또 기분이 좋아졌고, 내 사정을 봐주지 않고 잔학무도하게 6시를 외쳤던 분이 7시가 한참은 지나서 도착했어도 반가워서 웃음이 나왔다. 나에게 레몬의 효과는 정말 굉장한 것 같다.



레몬을 썰면서, 레몬 씨를 빼면서도 너무 기분이 좋았다. 스무 살 때 MT에서 벌칙으로 처음 먹어본 반쪽짜리 생레몬이 레몬캔디처럼 달콤했던 때도 기분이 좋았다. 대신에 구경꾼들은 재미를 빼앗겼지만. 그리고 집에서 보내던 최근 마지막 몇 번의 겨울 동안 엄마랑 같이 레몬청을 만들 때도 좋았다. 내가 무슨 계기였는지, 엄마한테 레몬청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었고 그렇게 처음 하게 됐다가 몇 번 더 하게 됐다. 계기가 뭐였는지 다시 생각해 보면 아마 레몬차라든지 레모네이드, 레몬청 따위 것들 사먹는 값이 짜증 나게 비싸서 만들어먹자 싶었던 것 같긴 하다.


늦게 온 동아리 멤버보다도 일을 더 많이 하고, 호스트로서 여러 가지 부담을 짊어진(쓰레기처리라든지, 다른 공유주택 거주자들의 눈치라든지) 분에게 병에 다 못 넣은 남은 청을 추가로 더 드리자니까 묵묵부답하던 지각 멤버에게는 정말 정이 많이 떨어졌다. 서기업무도 하려는 의지가 안 보여서 내가 전담하고 있는 사실은 까먹은 지 좀 됐었는데 그게 다시 생각이 날 정도였다. 그래서 끝나고 같이 저녁 먹으려고 하던 것을 마음을 돌리고 편의점에서 햄버거 하나 사 먹었다. 처음에는 똑 부러지고 확실해서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기적인 사람과는 계속 잘 지내긴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장한평역 앞에서 집으로 가는 교통수단을 검색하다가 또 혼자 다 처먹긴 비참할 것 같아서 레몬청을 주고 싶은 사람을 생각해 봤다. 그리고 지도를 봤다. 마침 지하철로 한 역이면 만날 수 있을만한 사람이 있었다. 갑자기 불러내는 게 미안하긴 했지만 일단 연락을 했다. 답장이 안 와서 그냥 갈까 하다가 '사람들이랑 저녁밥을 먹고 갔으면 이쯤 됐겠다' 싶은 시간까지만 기다려보기로 했다. 같은 시간이어도 그 사람들이랑 보냈을 경우보다는 레몬청 받을 사람을 기다리는데 쓰는 게 훨씬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밥 다 먹고 식당 종이컵 공짜 커피 한잔까지 다 마셨을 시간 정도까지 있다가 '이젠 가야겠다.' 하고 일어나는데 답장이 왔다. 한 역 뒤에서 일정이 있었다고 한다. 집에서 나오게 만들어서 미안할 일도 없고 동선도 너무 깔끔해서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플랫폼에서 접선을 해서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레몬청과 레몬청귤혼합청 중 뭘 줄지 깊은 고민을 했다. 상대방의 취향이나 선호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청귤혼합청은 안 먹어봐서 맛을 몰랐다. 결국 레몬청을 줬다. 내가 확실히 좋아하는 것을 줄 수밖에 없었다. 선물의 1원칙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줘야 한다는 것이겠지만 일단 이 경우엔 상대방이 원한 적이 없었고 원하는 것도 없었다. 그래서 선물의 2원칙인 기왕이면 주기 아까운 것을 줘야 한다는 것에 따랐다.


진로 때문에 고민을 하던 이 청년은 직무 관련 교육을 받으면서 한 주를 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상큼한 레몬맛을 통해 알 수 없는 활력을 받았던 나처럼 이 분도 그랬으면 하고 바랐다. 선물 받았다며 레몬청을 꺼내놓고 가족들이랑 차든 에이드든 한잔씩 하다 보면 미약하더라도 기분이 좋아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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