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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일, 21일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90번째

by 온호

20일 화요일


학교 도서관에서 한번 더 빌려서 『부활 2』 를 끝까지 다 읽었다. 이 책을 적절한 때에 읽은 것 같다. 요즘 많이 느끼고 있는 가치에 관한 것이기도 하고, 일기를 쓰면서도 "긍정의 편에 선다."는 것에 대해서 말을 하곤 했었는데 부활도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오랜 방황과 심리적 죽음을 마무리하고 "사랑, 희망, 믿음"에 대한 것을 믿고 지지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린 지금이 아니었으면 이 책을 읽은 것의 감동이 많이 줄었을 것이다. 아무쪼록 앞으론 지지 말고 선의 편에 잘 서있자.


연애소설적인 느낌도 꽤 받았다. 심리적 타락과 부활이 메인이지만 그래도 네흘류도프와 마슬로바 사이에 오가는 감정들의 묘사나 상황 묘사가 첫사랑에 대한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연애적인 것들이 많아서 읽기 편했던 것 같기도 하다. 표현들 자체의 인상은, 정말 그냥 내가 그 자리에서 인물들을 보고 있거나 아니면 내가 인물인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 말이 안 되는 몰입감이었다. 특히 마슬로바가 자신은 10 루블이면 충분하다고 말을 할 때는 마슬로바에 너무 이입이 돼서 가슴이 아팠다. 그 부분을 읽다가 울음을 터뜨리면서도 선한 눈물과 악한 눈물이라는 소설 속 묘사가 생각났다. 내 경우에는 '슬퍼서 흐르는 눈물'과 '감수성이 풍부한 자신을 사랑하는 눈물' 쯤 되지 않을까.




이 날 역대급 땡볕이었는데 유치원에서 모래놀이를 나가기로 결정한 것이 의외였다. 얼굴을 타고 땀이 주륵주륵 흘렀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정말 열심히 친절했다. 그리고 모래놀이를 아이처럼 똑같이 했다. 아이 얼굴을 타고 흐르는 사랑스러운 땀줄기를 보면서 내가 곧 여기를 떠나게 된다는 것을 떠올리자 적당히 대충 상대하려는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퇴근 전에 다른 근로장학생과 교실 청소를 하면서 대화를 나눠보니 이런 현상은 나에게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모든 퇴사를 앞둔 사람들에게도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인 것도 알게 됐다. "마음먹기", 또는 "심리적 거리"라는 것은 정말 강력한 힘을 지녔다.



21일 수요일


태풍 종다리의 영향으로 아침에 세차게 비가 왔다. 출근할 때쯤에는 비가 그렇게 강하게 내리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유치원에 도착해서 내 자리는 없는 우산꽂이 주변에 적당히 우산을 세워놓고 현관에서 실내화로 갈아 신은 후 교무실 앞을 지나갔다. 교무실 안에서 원감선생님이 전화를 받고 계셨는데 나를 보시더니 굉장히 다급하게 버스 하차 지점에서 등원 좀 도와달라고 하셨다. 아마 그 일을 담당하시는 선생님으로부터 비 때문에 늦는다는 전화를 받고 계신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하게 됐다. 등원 버스 인솔은 8개월 동안 일하면서 처음으로 해봤다. 원래 근로장학생이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만 떠날 때가 다 된 시점에 그 일을 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빗속에서 우산을 들고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노란 버스를 기다리면서 열흘 남짓 남은 근무를 생각할 때는 마음에 여러 것들이 스쳤다.


그러다가 곧 버스가 도착하고 반 아이들이 내릴 때 유독 사랑스러워 보여서 웃음이 절로 났다. 아이들은 항상 하루 중 처음 인사할 때 가장 선생님들을 반가워하기 때문에 그렇기도 했고, 유치원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좋은 것들이 더 많이 느껴져서 그렇기도 했다. 꼭 그런 것들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귀여운 우비를 입고 "선생님~"하고 생글거리면서 시끄럽게 나를 불러주는 5살짜리들 앞에서는 웃을 수밖에 없다.


퇴근 후 『부활 2』 의 독서기록을 남기면서 다시 읽다가 네흘류도프의 머릿속을 빌어 말하는 톨스토이의 일기에 대한 생각이 인상 깊었다.


이런 어린애 같은 장난은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린애 장난이 아니었다. 자기와의,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깃들어있는 신성하고 진실된 자기와의 대화였다.


소비자행동론에서 배우기로, 컴퓨터 같은 제품을 구매할 때 제품에 대해 잘 모르면 소비자는 그냥 브랜드만 보고 산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알면 파츠별로 강점이 있는 브랜드를 사다가 전문가 수준으로 많이 알게 되면 다시 브랜드로 돌아간다고 한다. 초보자와 전문가의 선택이 동일해지는 것이다.


나는 일기 쓰는 행위 같은 하나의 예시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도 이런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초등학생 정도로 어릴 때 세상과 인생에 대해 사색하면서 인생의 답을 맞힌다. 내 경우에는 초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 좌우명을 만들라는 숙제 때문에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현재에 충실하라."는 답을 내렸다. 과거와 미래는 없는 것임을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요즘 마음 챙김 같은 것을 하면서 이걸 다시 배우는 게 얼마나 웃긴 일인가 싶다.

다행인 건 나만 이렇게 어리석은 게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다 길을 찾아놓고 돌아서 간다. 답을 이미 알면서도 일부러 오답을 고르면서 산다. 그러다가 다시 원래 길로 돌아갈 마음만 먹는 데 성공해도 참 대단한 일인 것 같다.


우리는 매순간 이중적이고 위선적이지만 그래도 나는 네가 이쪽으로 왔으면 하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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