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9시에 건강검진 예약이 되어있는 날이었다. 기지개센터에서 '메디체크 청년행복'을 안내해 줬는데 안 할 생각이었다가 검진도 꼭 받아보시라는 한 청년의 말에 예약을 잡아놓았다.
난 전에 건강검진을 받아본 적이 없다. 직장도 없었고 오랫동안 늘 방 밖으로 나가는 걸 무서워하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건강검진을 받기 싫은 핑계로 떠올린 생각들이 있다.
1. 검진을 받았다가 혹시라도 병을 발견해서 조기에 치료해 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
2. 병을 발견하는 계기로 생존 욕구가 고개를 쳐들면 안 된다는 생각
그랬던 내가 양산까지 쓰고 극진히 나를 대하면서 한국건강관리협회 서울동부지부로 향했다. 살아있는 것이 좋다. 원망하고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보다는 용서하고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이 오히려 에너지가 더 적게 드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그건 나를 향한 나의 감정도 포함이다. 건강관리협회에 예약시간보다 빨리 도착했는데도 바로 검진을 진행할 수 있어서 좋았고, 그래서 그런지 검사받는 과정이 더 재밌었다. 굉장히 효율적이기도 했다. 중간소변을 받으라는 기계 같은 안내 멘트는 흘려들어서 그러질 못했는데 그게 결과에 영향을 크게 주려나 걱정하기도 했다.
마지막엔 인바디와 스트레스 검사를 했다. 인바디는 처음이었는데 주먹구구식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결과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 나와서 놀라기도 하고 기분 좋기도 했다. 결과 설명해 주시는 분이 D자형이 좋은 거라고 막 띄워주니까 더 신나서 인스타 스토리에 그만 인바디 결과지를 올려버렸다. 인스타에 매일 오운완 인증을 올리던 청년이 헬스 정기권이 끝나면서 운동 관련 스토리를 올리지 않게 되었는데 그 공백을 메꾼다는 명분으로 내 인스타 스토리에 인바디 결과를 올린 것이다. 자랑도 자랑이고, 나도 볼 때마다 그런 거 해보고 싶기도 했고. 어차피 볼 사람 보고 안 볼 사람 안 보는데 내 유치한 속내가 드러나든 말든 큰 상관은 없을 것이다.
바지 왼쪽 주머니에 마지막으로 넣어뒀던 양산이 없다는 걸 알게 됐지만 별 수 없어 그냥 기숙사로 돌아갔다. 기숙사에서 점심을 먹고 유치원 출근을 했다. 퇴근을 하고는 한 청년을 만나 학교 근처에서 식사를 했다. 내가 호스트를 했을 당시에 자조모임에 계시지 않아서 같이 못 놀았었는데 그게 아쉬워서 오시라고 몇 번 이야기를 했다.
밥을 먹기 전에 캠퍼스 투어를 시켜드렸다. 1:1이기도 하고 걷기를 좋아하시기도 하셔서 꽤나 구석구석 보여드렸다. 산책길에는 손님이 온 걸 아는지 자기 자리를 잘 지키고 손님맞이를 하는 고양이도 있었다.
아이스크림도 먹고 라면도 먹고 베트남 식료품 가게에서 맛있어 보이는 거 골라보기도 하고 차도 마셨다. 그러면서 마지막 시간에는 이야기하기 힘들었던 것도 털어놓기도 했다. 지금까지 지켜왔던 나를 좀 내려놓는 일이었다. 추한 모습도 드러내면 벽이나 거리감이 좀 사라진다던데 어땠을지 모르겠다. 실망을 하실 수도 있겠지만 나도 이제는 좀 편해지고 싶었고, 관계성 때문에 사람들과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다 보니 이 분에게 이야기를 하게 됐다. 속은 시원했다.
버스정류장에서 청년을 보내고, 와주신 것에 감사드리면서 방으로 돌아와서 잘 씻고 기분 좋게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