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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7일 토요일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88번째

by 온호

기대하며 기다린 하루였다. 오전에는 동대문구 1인가구 요리(주로 베이킹) 동아리에서 티라미수를 만들기로 돼있었고, 오후에는 한강 트래킹을 하기로 돼있었기 때문이다. 일정이 운 좋게 이렇게 잡힌 덕분에 티라미수를 만들어서 한강에서 걷기 전에 청년들과 나눠먹으면 되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트래킹에 참여하는 청년들에게 한 시간 반정도 일찍 모이자고 미리 이야기해서 예빛섬에서 만나기로 했다.


신사동, 곰 소품들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귀여운 공간에서 세 가지 종류의 티라미수를 완성하고 케이스에 귀여운 스티커도 붙여서 포토존에서 인스타 감성의 사진을 찍고 일정을 마무리했다. 수업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서 멤버들과 헤어졌다. 문제는 네 시간 후에 있을 모임까지 케이크를 살려놓는 것이었다. 날이 정말이지 뜨거워서 레이디핑거까지 녹아 흘러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솜씨당 작가님에게 냉장고에 넣어놨다가 이따 찾으러 와도 되겠냐고 정중하게 여쭤봤다. 선생님은 냉장고에 자리가 없다고 하시면서 대신 얼음팩을 드리겠다고 하셨고 아마 베이킹 재료를 구매하실 때 들어있었을 쿠팡 로켓이 그려진 얼음팩을 하나 주셨다.


부활 2권을 전자책으로 읽고 있는 중이었지만 종이책으로 읽고 싶었기 때문에 시간도 때울 겸 약속 장소 근처 반포동 도서관 같은 곳에 가려고 했다. 도착하니 도서관은 휴무였다. 지도에서 검색했을 때 반포3동 도서관만 유일하게 "휴무" 표시가 없어서 방심하고 그냥 갔다가 당했다. 얼음팩은 이미 물이 된 지 오래였고 땀도 많이 났지만 다른 도서관을 검색해서 또 걸어갔다. 그냥 '서울구경할 기회다.', '운동이다.' 생각하니까 짜증 날 일도 없었다.

지하도. 하얀 공간을 볼때는 언제나 미래적인 느낌을 받는다.

서초구립반포도서관에 도착해서 카페에서 일하시는 분께 "죄송하지만 케이크 보관해도 괜찮을지" 여쭤봤다. 참 뻔뻔해졌다. 맛있는 상태로 나눠먹고 싶은 욕심 때문에 냉장보관이 간절하기도 했고. 종업원분으로부터 "카페는 장애인 분들 일터고 원칙적으로 무언가를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죄송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차피 지푸라기였기 때문에 '역시나 이렇게 되겠지.' 하고 "아니에요, 제가 무리한 부탁드려서 죄송하지요."하고 깔끔하게 단념하고 돌아서는데 인정 많은 종업원 아주머니께서는 "미화 여사님한테 부탁드려서 휴게실 냉장고에 넣어놓으라."라고 알려주셨다. 그래서 그렇게 했고 여사님도 흔쾌히 도와주셨다. 두 분께 정말 감사했다. 도서관에서 다시 약속장소로 이동을 해야 하니 얼음팩도 다시 얼릴 겸 냉동고에 야무지게 넣어놓고 부활 2권을 찾아서 읽었다.


전자책이 어떠니, 번역 차이가 어떠니 했던 것이 무색하게 다른 번역가 버전의 부활 2권 전자책을 계속 읽다 보니 적응이 돼서 오히려 기존 번역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참 내가 잘 알지도 못하고 또 꼴값을 떨었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1권과 같은 출판사, 같은 번역가의 종이책으로 2권을 마저 읽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 뭐 어쨌든 전자책은 책을 누워서 볼 때 조명 위치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 좋다는 걸 발견했다.


도서관에서 약속장소로 출발할 시간이 돼서 STAFF ONLY 딱지가 붙어있는 휴게실 문을 열고 냉동고에서 케이크를 담은 봉다리를 꺼내 나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중얼거리면서.


다시 걸어서 예빛섬에 도착했다. 밖에서 사람들을 기다리다가 습하고 뜨거운 공기를 버티지 못하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편의점 문 앞에 아이스크림 냉장고가 보여서 사장님께 말씀을 드리고 티라미수를 보관했다. 얼음팩도 또 물이 된 지 오래였다. 사람들이 다 모여서 케이크를 꺼내갈 때는 마침 사장님이 문 앞에 계셔서 "감사합니다, 신세 졌습니다."하고 말씀드리니 사장님은 오히려 나한테 도움을 줄 수 있어서 기뻐하시는 눈치셨다.


다른 한 분은 화과자 만든 것을 가져오셨다. 한 분은 음료가 없다고 편의점에서 음료를 사 오셨다. 화과자를 만들어오신 분은 이렇게 만들어서 나눠 먹으면 행복하지 않냐고 말씀하셨다. 그 말대로 편의점 테이블에 둘러앉은 우리들 모습은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 이게 맛있니 저게 맛있니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티라미수도 먹고 화과자도 먹었다. 주말에 방 안이 아닌 곳에서 여유도 즐기고 트래킹을 하면서 건강한 활동을 한다는 것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우리끼리는 아마 알 것이다.


그러다가 나한테는 속상한 일이 생기기도 했다. 예상을 할 수 있는 문제였고,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다르게 그 일이 일어났다. 그 바람에 짜증도 나고 화도 났다. 내가 이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 그게 엇나가자 반대급부로 부정적 감정도 그만큼 따라서 커졌다. 지금도 이 문제가 좋게 해결될 수 있도록 하고 싶지만 주제넘은 일인 것 같아 나서기가 힘들고, 그래서 욕구불만 상태다.

사람들에게 거리감이 느껴져서 대화를 하지 않고 앞에서 사전 공연을 혼자 구경했다. 박수도 치고 노래도 따라 부르고 마스크 속에 엄청 잘생긴 얼굴을 감춰뒀던 꼬마에 감탄하기도 했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트래킹이 시작되었을 때도 블루투스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들으면서 혼자 걸었다. 지랄염병 떨고 자빠졌다.

그렇게 혼자 앞에서 빠르게 걷다가 반포대교에 들어섰을 때였다. 풍경이 참 예뻤다. 이렇게 예쁜 순간이 우리들 인생에 흔적을 남겼으면 했다. 그래서 멈춰서 사람들을 기다렸다. 혹시라도 못 보고 놓칠세라 지나가는 사람들을 주시했다. 배번호를 붙인 아는 얼굴들이 하나씩 도착했다. 참 이상하게도 그 얼굴들을 다시 보자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고 웃음이 나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 같이 가는 게 더 좋구나.' 다시 한번 생각했다. 셀카를 찍으려고 하고 있으니 마침 지나가시던 복지사 선생님께서 사진을 잘 찍어주셨다. 청년들에게 전달했다. 보기만 하지말고 간직해줬으면 하는데 어떻게들 하고 계신지 모르겠다.


영양가 없고 시시콜콜하지만 '내가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만은 분명히 느껴지게 해주는 이야기들을 하면서 걸었다. 가로등 불빛이 충분히 밝지 않아 깜깜한 흙길을 걸을 땐 불현듯『유진과 유진』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중학생 때 타의로(숙제든 뭐든)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게 된 책인 것 같고 20년 가까이 생각해 본 적 없는 책이었는데 이 순간 갑자기 떠올라서 내 스스로도 신기했다. 아마 당시에 굉장히 나한테 강하게 다가왔었던 모양이다. 책 내용 중에서 단체로 캄캄한 길을 걷는 장면이 있었던 것 같고 그동안 유진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중요한 장면이었던 것 같은데 그것같다고 생각했다.


나도, 다른 청년들도 어쩌면 유진일 것이다.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걷고 있다. 각자 서로가 어떤 상처가 있는지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지만 굳이 더 알고 싶지는 않다. 말하고 싶어 한다면 들을 것이고 아니라면 그냥 옆에 있어주고 싶다. 그렇게 같이 걷다가 어딘가쯤에 다다랐을 때 상처가 좀 아물고 우리의 기분이 좋아져서 혼자 걸어도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된다면 그걸로도 괜찮을 것 같다.


트래킹이 끝나고 같이 한강라면을 먹었다. 나의 인생 첫 한강라면이었다. 라면 종류는 어릴 때 주방 가스레인지 위 코너장에 아주 가끔 있으면 먹곤 했던 진라면 순한 맛으로 골랐다. 엄마가 늘 밥을 잘 차려주셨기 때문에 라면 먹을 일이 많지 않았는데 먹게 된다면 진라면 순한 맛이었다. 첫 한강라면인 만큼 종이 그릇에 그런 의미를 같이 담고 싶었던 것 같다.


하루종일 많이 걸어서 배가 고파 그랬는지 한입 먹으니까 너무 맛있었다. 라면을 먹다가는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해서 누군가의 걱정거리를 늘린 것 같기도 했다. 푸념을 늘어놓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은데 그렇게 매번 후회를 하면서도 아직도 조절이 잘 안 된다.


라면을 다 먹고 역으로 가는 길에는 길 위에서 자유분방하게도, 땀에 젖은 상의를 갈아입었다. 역에 가서 화장실에서 갈아입을 생각이었는데 뒤에서 상의탈의를 한 채 러닝을 하는 사람을 보니 괜찮겠다는 생각이 좀 들었다.


길이 갈릴 때에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몇몇으로 흩어졌다. 나와 남게 된 청년에게 플랫폼에서『유진과 유진』이 생각났다는 이야기를 했다. 『유진과 유진』이 떠오른 순간에 같이 걷고 있던 청년은 그 책을 몰라서 혼잣말이 되었었는데 이 때는 대화가 연결이 됐다. 책은 아니고 뮤지컬로 알게 됐다고 하셨는데, 내가 어렴풋이 기억하던 내용의 구체적인 내용을 말해주셨다. 거기서 오는 어떤 편안함과 만족감을 느끼면서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지하철을 탔다. 언제나처럼 조용히 가는 것을 못 참는 내가 침묵이 어느 정도 이어질라치면 이내 지껄이는 일이 몇 차례 반복됐다. 이 청년이 속으로 NELL의 「1분만 닥쳐줄래요」 를 떠올리고 있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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