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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6일 금요일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87번째

by 온호


작년 고립은둔청년 지원사업에서 만나서 알게 된 한 청년이 청년센터에 매니저로 취업을 했다. 그리고 본인이 기획한 프로그램에 나를 초대했다. 나는 반년만에 이런 용무로 연락을 해온 청년에게 내심 서운하기도 했지만(내가 지속적인 교류를 권하고 먼저 연락할 땐 여러 차례 거절 의사를 내비쳤다.) 결국에는 그런 마음보다는 다시 앞으로 걸음을 내디딘 청년의 인생을, 회사생활을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참여신청을 했다.


유치원 오후 근무를 빼야 하는 것이 부담이었지만 돈 몇만 원을 안 벌더라도 오랜만에 예전처럼 이 청년의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하는 것이 그 이상의 가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힘들게 고민하고 연락했을지 알기 때문에 거절로 인한 실망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면 그로 인한 내 마음의 고통의 값이 훨씬 컸을 것이다.


전시를 크게 좋아하지는 않기 때문에 콘텐츠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냥 사람을 보러 가는 일이었다. 장소는 라이트룸서울이었고 언제나처럼 초행길이었기 때문에 고덕산을 넘어갈 때는 '여기가 맞나.' 싶었다. 전시 중에 나름 생동감과 감동이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대부분 익숙한 내용이라 큰 감흥은 없었다. 72년 아폴로 17호가 마지막 유인달탐사라는 것과 아르테미스 미션이 벌써 내년으로 다가왔다는 걸 까먹지 않게 외울 수 있게 된 부분은 좋았다.

역에서 내려 약속 장소로 가는 길. 여름 하늘은 정말 새파랗다.

프로그램이 끝난 장소 바로 옆에 있는 맘스터치에서 매니저 청년과 밥을 먹으면서 대화를 좀 나눴다. 작년 느낌, 내가 바깥활동을 처음 시작했던 때의 추억들이 살아나는 부분을 빼고는 대화자체가 그렇게 좋았는지는 모르겠다. 낯선 청년이 같이 대화가 하고 싶었는지 자리에 껴있기도 해서 그랬고, 청년에게서 우리들(고립은둔청년)이 대부분 그렇듯 지나치게 걱정이 많고 부정적인 결과를 주로 예측하는 모습을 많이 봤는데 그게 좋게 다가오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답답하게 느껴졌다. 사정을 이해도 하고 안타깝고 유감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난 청년에게 조금 더 극적인, 긍정적 변화를 기대했던 것 같다. 이 날의 기분을 어떻게 정리해야 될지 어렵다. 좋기는 좋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전우애는 다분히 느껴지고,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가능한 돕고 싶다.




그리고 헤어지고 나서 세종문화회관에서 포레스텔라의 조민규가 해설(MC)을 해주는 오페라 관람을 했다. 기지개센터에서 티켓을 제공해 주었다. 고민을 하다가 뒤늦게 참여 신청을 했기 때문에 선착순에 밀려 원래라면 볼 수 없었는데 당일에 못 오는 사람이 생겼는지 대기열에 있던 나에게 차례가 돌아왔다. 참여 신청을 고민한 이유는 누군가 다른 고립은둔청년이 이 공연 관람을 계기로 정말 오랜만의 외출을 시도할 수도 있는 일인데 내가 그걸 가져가고 싶지가 않아서였다. 나는 이제는 다른 외출도 많이 하고 있으니까. 인원제한이 있는 프로그램은 그래서 다 뒤늦게 신청을 했다. 아니다. 이건 솔직하지 못한 거 같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더 큰 동기가 있었다. 의욕이 없고 심통이 나서 신청하지 않은 것이 더 큰 이유다. 그래.

고립은둔청년 지원사업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는 공석이 생기는 일이 비일비재다. 당일에 정말 사정이 생겨서 불참하기도 하겠지만, 아마 대부분은 세상에 자신을 노출시키려던 결심이 막상 당일이 되면 두려움 때문에 흩어져버려서 그렇다. 노쇼나 당일 참여 취소 통보를 비매너로만 보기에는 예비군 일정이 잡히면 죽고 싶었던 나로서 너무나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이 늘 든다. 그리고 그런 마음 뒤편으로는 기회가 생겨서 기뻐하는 마음도 있고.

홀에서 익숙한 청년들을 만나기 시작하자 작년 연말 생각이 나면서 기분이 묘했다. 8개월 만에 재회한 청년도 있었다. 굉장히 건실한 청년이고 작년에 청년이음센터 활동을 하는 동안 사람들에게 정말 다정하게, 따뜻하게 대해줘서 모두가 좋아했던 청년이다. 경청해 주는 눈빛, 응답해 주는 듣기 좋은 예쁜 말들에 어색함이나 다른 의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청년이 보여주는 인류애는 굉장히 성숙하고 진실했다.


나는 그래서 그 청년과의 1:1 카톡으로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 걸 8개월 동안 몇 번 정도 참았었다. 질문할 말은 이미 만들어놓았지만 상상으로만 물어볼 뿐이었다.


"oo님은 다른 사람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고 상대방이 필요한 말을 잘해주시는데 그건 어떻게 가능한 건가요? oo님이 사랑이 많으신 분이어서 그런 것인지, 대화법에 대한 훈련을 따로 받으신 것인지 궁금하네요."


차마 이렇게 물어보기에는 정말 사람이 없어 보여서 그럴 수가 없었다. 말하자면 "너 그거 스킬이야 진심이야?"인 것인데, 이렇게 사람이 추할 수가 있나. 질투하는 남자만큼 볼썽사나운 게 없다. 스킬이면 나도 배워볼 심산이고 진심이면 아마 나는 평생 가지지 못할 것 같으니 질투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오페라 관람이 끝나고 나와서 편의점에서 맥주를 하나씩 사서 마시면서 청년들과 대화를 나눴다. 근황과 일상적인 이야기들, 농담들을 나누던 중 잠깐 대화가 뜸해졌을 때 나는 용기를 냈다. 저속한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질문을 하기가 정말이지 민망했지만 답을 듣고 싶은 마음이 컸고, 곧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 용기를 내는데 도움을 줬다. 그래서 만들어둔 질문 그대로를 머릿속에서가 아니라 입 밖으로 냈다.


그러자 청년은 자기는 사람을 좋아해서 그런 거 같다고 대답했다. 학교에서 코칭 수업 같은 것을 배운 적이 있으시냐는 말에는 코칭이라는 용어 자체를 알지도 못하는 반응이었다. '그렇구나. 역시 그런 거였구나. 배워서 말은 바꿔하더라도 눈빛을 바꿔 볼 순 없겠지.' 배우면 나도 그런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좌절되면서 어쩐지 시무룩했다. 배웠다는 말을 듣기를 바랐던 것 같다.


뜻밖의 만남에 기쁜 동시에 그 만남으로 방해받은 것도 있었다. 그리고 나한테는 방해받은 것이 더 중요했는데, 청년들과 헤어지고 집에 돌아와서야 그걸 알아차리고 후회를 했다. 근데 이런 후회를 하고 나니 뭐가 더 중요한지 생각하는 집중력이 더 생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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