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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고양이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86번째

by 온호

오늘 아침 6시 반쯤, 캠퍼스 산책길 데크 위에서 쉬고 있던 고양이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으려고 가까이 갔더니 고양이 녀석이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이 때는 고양이들 특유의 탐탁지 않은 것을 보는 듯한(굉장히 띠꺼운) 눈빛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바라보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아! 고양이의 이런 눈빛과 더 큰 관심을 받을 수만 있다면 사료든, 츄르든 뭐든 갖다 바칠 수 있겠다!'


일순 쿠팡 앱에 들어가서 츄르를 검색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지만 내 간식비도 빠듯해서 참았다. 그리고 다행히 고양이는 곧 다시 평소대로 불만 있는듯한 표정을 지었기에 나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살짝 가셨다.

이 짜식이..


머리에 8자 가르마 무늬가 있는 고양이를 일본에서는 "하치와레"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는 걸 며칠 전 알았다. 그리고 오늘 산책하면서 본 아침잠을 곤히 자고 있던 두 번째 고양이가 바로 그런 하치와레라는 쪽에 속할 수 있는 고양이라는 걸 생각했다.


'저게 바로 하치와레라는 것인가?!'


다음번에 하치와레나 먼작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그때는 아는 척이라도 할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 (하치와레는 농담곰으로 유명한 일본의 일러스트레이터 나가노 작가의 만화, <치이카와>에 등장하는 캐릭터)




어제는 기숙사행정실로부터 기숙사연장과 관련된 메시지가 왔다. "기숙사연장"이라는 건 18일까지가 기숙사 퇴사 마지막날이고 2학기 입사 수속은 22일부터인데 그 사이 기간 동안 추가비용(27,000원)을 내고 계속 기숙사에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학기에는 이런 것이 없어서 짐을 전부 빼서 나갔다가 3일 만에 다시 돌아오는 일을 경험했다. 그때는 그 일에 대해 작은 부조리라고 느꼈고 '그냥 계속 있게 해 주면 안 되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면서도 '기숙사 위생 관리나 방역 작업에 꼭 필요한 일이겠지.'하고 납득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기숙사연장도 사실 이전 학기와 같은 호실에 배정되지 않으면 짐을 싸서 이동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라 내심 불안했는데 다행히 같은 호실을 배정받았다. 이걸로 세 학기를 같은 방을 쓰게 됐다. 요즘은 이런 일 때문에 다음 룸메에 대해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어서 불쑥 불안한 마음이 찾아오기도 한다. 제발 코 고는 룸메만은 걸리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제발!


그리고 오늘은 부활 1권을 다 읽었다. 나는 단연코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부활>을 "인생책"이라고 말할 확신이 생겼다. 그전까지는 일단 읽은 책이 많지도 않거니와, 인생책이라고 부를 만큼 읽으면서 페이지마다 환희가 드는 책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부활을 읽으면서 든 또 한 가지 생각은, 톨스토이의 MBTI 검사 결과가 있다면 아마 분명히 나랑 똑같은 INFJ 일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어느 정도 확신한다. 어차피 검사해 볼 수도 없을 테니까 세게 말해도 되겠지.


1권을 다 읽고 휴일이라 여유 있게 책을 읽어도 되는 만큼 2권이 몹시 간절했지만 중앙도서관도 휴무기 때문에 별 수없이 전자책이라도 빌려봤다. 전자책은 1권과 같은 출판사의 2권이 없어서 부득이 다른 걸로 읽어보려고 했다. 근데 문학동네의 부활 2권의 초반이 먼저 읽은 민음사 1권의 후반과 겹쳤고, 그래서 2권을 읽다가 1권과의 번역의 차이를 느끼게 되었다. 1권과 똑같은 대목에서 내가 기억하는 민음사판 1권의 기가 막힌 표현들과 문학동네판 2권의 표현 느낌이 굉장히 달랐다. 심지어 문장 구성 자체가 달라질 때도 있었다.


'번역본은 확실히 작가의 문장이 아니라 번역가의 문장일 수도 있겠네. 원서라도 읽어야 되나?'


터무니없는 욕심이 스쳤지만 그런 원대한 꿈을 품기엔(노어 공부를 하기엔) 지금은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빠 같은 사람은 성경 관련해서 히브리어나 헬라어 지식이 조금 있는 걸로 알지만 나는 어쨌든 그렇게까지 할 건 아니니까. 일단은 영어 말하기부터 해야 한다.


아무튼 그래서 2권을 더 읽고 싶지 않아 져서 같은 번역가의 버전을 내일 빌려서 마저 읽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문제(번역가의 번역 철학, 문장력에 따른 독서 경험의 차이)에 대해 위기감을 크게 느끼고 번역가에 대해서 검색을 해봤다. 내가 읽은 부활은 1권이 번역가 박형규, 2권은 번역가 백승무의 번역이었다. 박형규라는 이름을 기억하기로 했다. 무한도전 길의 "엮은이는 아는데요, 김경식 씨."에 이어 내가 기억할 수 있는 두 번째 번역가가 생겼다.


책을 다 읽고서는 생일이 지난 후에야 생일인 걸 알게 된 청년에게 겸연쩍은 마음으로 뒤늦은 축하 메시지를 보내다가 낮잠에 빠졌다. 아무래도 밤에 깨서 오후까지 다시 자지 않았더니 그렇게 됐다.


침대에서 일어나서는 중앙도서관으로 24-2학기 수업시간표와 근로시간표를 표로 만들어서 보냈다. 이틀 전쯤 문자로 23일까지 중앙도서관 이메일로 시간표를 제출해 달라는 메시지가 왔었기 때문이다. 시간표를 만들고 강의를 듣는 시간과 근로가 가능한 시간에 색으로 표시하면서 보니 또 운 좋게 시간표가 일하기 좋게 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었다.


9월부터 대학 병설 유치원이 아닌 도서관에서 일하려고 결심한 것은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갈 때마다 보게 된 근로장학생 지정석에서 책 읽는 학생들 때문이다. 그 학생들을 볼 때마다 부러웠기 때문이다. 그게 소위 꿀을 빨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 아니다. 솔직히 꿀을 빨고 싶은 마음이 거의 전부이다. 여기서만큼은 위장하지 말아야지. 책을 보기 위해 따로 시간을 내야 하는 것도 부담이라느니, 돈을 벌면서 공부도 할 수 있다느니, 유치원에서 일하는 생활에는 다쳤던 허리에 너무도 좋지 않은 동작과 자세가 많다느니. 이런 것들은 전부 진실이지만 이직(?) 동기에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다. 그냥 나는 유치원 근무에서 숭고한 보람을 느낌과 동시에, 사서 하는 고생에 지치기도 한 것이다. 꿀 근무지를 찾아 동분서주하는 여느 대학생들처럼 나도 양심을 거슬러서 내 안위를 위해 편하게 일해보고 싶다는 마음.


그렇다고 젖과 꿀이 흐르는 도서관을 핥아먹고 싶기 때문만에 도서관을 선택한 것도 아니다. 느니느니했던 이유들도 분명히 작용했고, 14년 전 신입생의 신분일 때 학교 도서관에 처음 갔다가 느꼈던 감동이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책을 찾을 때마다 매번 헷갈리는 청구기호 읽는 법을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강제로 공부할 계기로 삼고 싶기도 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굳이 좀 더 책을 빨리 찾기 위해 청구기호 공부까지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월요일에 유치원 출근을 할 때였다. 언제나처럼 입구에서 아이를 맞이하고 계시는 원감선생님과 경쾌하게 인사를 나눴다. 원감선생님은 반달모양의 눈웃음이 참 예쁘시고 피부가 약간 투명한 편이면서 팔다리가 여리여리하신 분이다. 또, 유치원에서 가장 사람 좋고 내면이 깊다는 인상을 주는 분이시기도, 근로장학생 근로지로서의 유치원 담당자이시기도 하다. 그런 선생님이 이 때는 인사를 한 후 마주친 눈이 떨어지기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선생님, 저희 이제 곧 슬슬 끝나가죠.."


물어보는 듯한 말이었지만 끝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려갔다. 그리고 이 말을 할 때의 선생님의 표정은 불안, 슬픔, 걱정 그리고 무언가를 잃은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섞인 표정이었다. 나는 선생님의 그런 태도에서 어쩐지 위화감을 느꼈지만 이유는 알지 못했다. 다만 덩달아 순식간에 조금 슬퍼지기도 했고, 동시에 감선생님이 다시 한번 상기시켜준 내가 유치원에서 탈출한다는 사실로 인해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예.그쵸"하고 웃으면서 대답하고(그래도 아쉬움을 내비치기 위해 절제해서 웃었다.) 배정된 교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퇴근을 일찍한 그 날 오후에 기지개센터 프로그램을 마친 후 홍제 폭포 앞에서 청년들과 한가로이 휴식을 즐기던 시간에 나의 이직(?)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가 아침의 원감선생님 이야기를 했더니 한 청년이 내가 새로운 근무지 배정을 받았으니, 원감선생님도 근무지 담당자로서 다음 학기 근무자 명단을 받은 것이 아니겠냐고 유추해서 말해줬다.


아.


그 말을 듣고 왼쪽 눈과 안검하수가 심한 내 오른쪽 눈까지 동시에 최대한 동그랗게 커졌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모든 게 맞아떨어졌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게 이해가 안 될 만큼 아주 명백하게 논리적인 유추였다. '선생님이 알았구나! 아셨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그제서야 선생님의 슬픈 표정, 서운한 이별을 알게 됐으면서도 혹시나 싶은 기대로 내게 재차 확인해 보려던 조심스러운 그 말과 표정이 이해가 됐다. 슬프고 미안한 마음이 상당히 크게 들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건 내 앞에 이성 두 명이 앉아 있었기 때문인 영향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아무래도 전반적으로는 그런 슬픈 마음이 앞으로 도서관에서 일하게 될 것에 대한 기대를 이기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인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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