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크리스마스라니 멋지네
오늘은 2023년의 크리스마스. 일어나서 창 밖을 보니 영화 속 장면 같은, 정말 포슬포슬하고 큰(손가락 마디 하나만 한) 눈송이들이 그림처럼 내리고 있는 풍경이 보였다. '화이트 크리스마스구나. 멋지다. 누군가는 너무 행복한 아침을 맞이하겠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크의 비참함은 닳고 달아서 사라진 건지 아니면 긍정력이 좀 올라간 건지 필터를 거치지 않은 내 감정의 원액으로도 저런 생각이 나온다는 게 신기했다.
점심에는 그동안 미뤄졌던 동생과 나의 '언제 밥 한번'이 드디어 크리스마스라는 중력을 만나 청파동에서 모이게 됐다.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낼 나를 위해 동생은 어제 연락을 해 밥을 같이 먹고 교회도 같이 가자 했다.
동생과 동생 남자친구와 남영역 근처에서 식사를 했다. 식사를 그곳에서 하게 된 이유는 고립은둔 청년 지원 프로그램에서 보여줬던 소설 원작의 연극 '불편한 편의점'의 배경인 푸른 언덕, 청파동을 가보는 재미도 있을 것 같다 싶기도 했고 내가 예전에 현역으로 학교를 다닐 때 살았던 동네이기도 했기 때문에 다시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동생은 내가 한 때 같이 살았던 청파동 집에 여전히 살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이유로 청파동에서 먹게 되었다.
어제 네이버로 찾아보고 고른 식당은 오늘 직접 가보니 유독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공을 들인 티가 났다. 건물 입구부터 큰 빨간 리본 장식을 해놓고 있었고 내부에는 조명이나 트리들로 크리스마스 냄새를 물씬 풍기는 것은 물론이고 산타가 그려진 냅킨 같은 디테일까지 기분을 좋게 만들어줬다. 그리고 어제 서로를 배려하느라 장소나 메뉴가 자꾸 변동이 있어서 살짝 짜증 난 상태로 대충 찾아보고 고른 식당인데도 가보니 웨이팅도 있고 안에 손님들도 많이 있어서 안심이 됐다.
식사를 맛있게 하고 누나들과 자주 갔던 청파동 와플하우스에도 가서 디저트까지 기분 좋게 먹었다. 식당에도, 와플하우스에도, 길거리에도 온 세상이 성탄절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가족과 연인들만 있었다. 그걸 보면서 크리스마스에 집에 있기 때문에 불행한 것은 아니지만 밖에서 누군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일이 없는 사람들은 집에 있을 테니 여기엔 저런 사람들만 모였겠지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던 중 오빠가 가져가도 되는 쿠키가 많다는 말에 넘어가 교회까지 같이 가게 됐다. 도서관 이벤트 때는 긴가민가 했지만 오늘 확실히 쿠키가 나한테 강력한 동인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나도 더 긴 시간 동안 '크리스마스에 밖에서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으로서 있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교회까지 가서 사람들과 인사도 나누고 예배도 드렸다.
동생이 친오빠라고 나를 소개할 때마다 사람들은 연신 너무 닮았다며 놀라고 신기해했다. 어쩌다 대화가 조금 더 길어진 상대는 직업을 묻기도 했다. 학생이라고 하자 대학원생? 하는 이미 여러 차례 겪은 패턴을 한번 더 경험했지만 이제는 별 수치심도 들지 않는 나를 보고 '성장했네.' 싶었다. 뻔뻔해진 걸까?
간식을 담은 종이 상자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나를 보면서 지금 내가 처한 상황,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시간을 가지게 됐다. 한 살, 두 살 차이 밖에 나지 않는 동생 커플이 사주는 밥을 얻어먹고선 연말에 불우이웃을 돕는 교회의 따뜻한 손길(쿠키, 간식)의 수혜자가 된 나. 헛웃음이 난다. 이게 나라니. 근데 이게 지금의 나인 걸 뭐 어쩌겠는가. 부끄러울 수도, 비참할 수도,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었지만 헤어지면서 그저 고맙다고 했다. 다음엔 내 차례도 분명 있을 거라 확신하면서. 감사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