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키코모리 탈출 일상
12월 23일 토요일. 1
청년이음센터를 통해 알게 된 청년분들과 불암산에 다녀왔다. 9월에 재입학을 하면서 가졌던 계획 중에 하나가 둘레길 스탬프를 찍어 모으듯이 서울의 여러 산들을 다녀보고 내 마음속 지도에 스탬프를 모으는 것이었는데 계획했던 혼자가 아니라 많은 사람과 함께 하게 된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맛있는 겨울 공기도 산에서 실컷 마시고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하체 운동도 하니 얼마나 좋은지. 정상에 도착해서는 가장 높은 곳에 서서 사진도 찍었다. 산을 굉장히 잘 타시던 일행 분에게 부탁을 드렸는데 잘 못 찍으신다며 인생샷을 남겨 주셨다. 지금 내 카톡 프로필 사진이다.
며칠 동안 굉장히 추웠던 날씨가 등산 당일 많이 풀린 것에 감사함을 느끼면서 다 같이 무사히 산을 내려왔다.
식사는 국밥집을 정해서 길을 찾아가던 도중에 보인 메밀집으로 융통성 있게 선회해서 들어갔다. 맛있어서 다음에 또 오고 싶을 정도였으니 결과적으로 굉장히 성공적인 선택이었다. 일행들은 식사 후 보드게임을 하러 갈 계획이었지만 나는 오후 4시에 혜화에서 연극을 보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사를 나누고 먼저 식당을 나서 기숙사로 향했다.
등산 후 샤워를 하기 위해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1층 홀에서 경비아저씨를 마주쳐 인사를 드렸다. 최근 사람 간의 연결과 소통의 소중함을 조금 느끼게 된 나는 인사만 잘하라던 교수님의 조언을 착실히 실천 중이었다.(산에 갔을 때도 혼자 정상에서 셀카를 찍던 중년의 남성 등산객에게 굳이 사진을 찍어주는 오지랖을 부렸다.) 경비아저씨에게 인사를 드리면 대게는 고개 끄덕임이나 눈 맞춤 후 지나치지만 가끔은 아주 짧게 스몰토크를 나누는 경우도 있다. 이 날은 뜬금없이 보드를 탈 줄 아는지, 좋아하는지 물으시길래 잘 타는 건 아닌데 좋아하고 탈 줄은 안다 대답했다. 왜 그러시나 했더니 학기가 끝나면서 기숙사 퇴사를 한 학생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주라고 놓고 간 스케이트 보드가 있다고 그걸 줄 사람을 찾고 계셨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요즘 며칠 동안 보드도 없으면서 캠퍼스 안에서 보드를 탈만한 곳이 자꾸 눈에 보여 '보드가 있어도 괜찮겠는데?'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기 때문에 이게 무슨 조화인가 놀랍기도 하고 묘한 기분으로 보드를 건네받았다.
이 일이 있기 전 한 번은 고립은둔청년 지원 센터에서 복지사 선생님께서 기숙사로 직접 오셔서 식료품으로 가득 찬 4호쯤 되는 우체국 박스를 배달하고 가신 일이 있었다. 나는 그날 센터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 중이어서 밤늦게 기숙사로 귀가했고 상자를 금방 회수해갈 수 없었다. 밤에 기숙사에 도착해 상자를 보고는 흠칫했다. "고립은둔청년 지원키트" 스티커가 큼지막하게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그 상자를 들어 올리는 때에 마침 경비아저씨가 나타나 이게 무엇인지 내 거였냐며, 주인을 알 수 없는 큼직한 박스가 덩그러니 있어서 반나절 동안 기숙사로 제대로 온 물건이 맞는 건지 어찌해야 하나 곤란하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셨군요. 서울시에서 지원받은 것인데 먹을 것이 좀 들어있습니다."
그날 고립은둔청년 학생이 나인 것을 아셨기 때문일까, 그저 인사성 밝은 학생이 흡족하셨기 때문일까 경비아저씨는 보드를 주시며 그나저나 이름이 뭐냐며 내게 물으셨다.
"아무개라고 합니다, 선생님 성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이따 알려줄게."
뭘 어떻게 이따 알려주신다는 건지는 보드를 한 팔에 끼고 운동 삼아 계단으로 5층을 올라 내 방 문 앞에 도착했을 때쯤 'ㅇ셰프'로부터 온 카톡을 받고 알게 됐다. 아하 관리인은 이름으로 호실과 전화번호를 다 알 수 있겠구나 참. 뒤늦게 이해하며 카톡을 눌렀다.
1:1 카톡방에는 경비아저씨가 멋진 셰프복을 입고 유명 호텔 주방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과 함께 "전직 일식셰프"라고 짤막한 카톡이 와있었다.
[오 너무 멋지신데요!! 보드 안 다치고 잘 탈게요 감사합니다. ㅠㅠ]
[나중에 소주 한잔하자고~]
[옙! 감사합니다 말씀만 해주세요 ㅎㅎ]
[네]
아무래도 도수치료 선생님이나 체육관 관장님처럼 내 굴곡을 조금 알게 된 인생 선배가 또 한 분 생긴 것 같다.
아주 별 거 아닌 사소한 교류가 이렇게 인연을 만드는 일을 겪고 있자니 이게 인생인가, 삶인가 싶다. 내 계획이나 의지보다는 인생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느껴진다. 인사를 하는 것에 내가 무언가를 바랐던가. 인사를 나누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지나치는 것이 나를 더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에 나를 위해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뜻밖에 술을 사준다는 어른이 생기게 됐다.
방에서만 지내던 시절에, 밖으로 나가 평범하게 살면서 소주를 마시고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는 날도 올까 상상한 적이 많다. 용기 내 밖으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 그 일에 가까워진 것 같다.
내 인생 제법 흥미롭게 느껴진다. 행복한 거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