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3일 토요일. 2
보드를 기숙사 방 현관에 기대어 세워놓고 경비아저씨와 짧은 카톡을 나눈 후 샤워를 했다. 노브랜드 100개입 인스턴트커피를 하나 꺼내 등산용으로 사서 먹고 남은 초코바를 같이 먹으며 잠깐 쉴까 하다가 확인차 네이버 지도로 목적지를 찍어봤다. 예상했던 것보다 혜화에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빠듯했다. 휴식은 포기하고 얼른 준비해서 나왔다. 어디 다닐 일이 없던 내가 시간 맞춰 도착하는 일에 최소한의 요령이 생긴 셈이다.
기숙사를 나와 핸드폰으로 버스 도착 시간을 확인하면서 정류장으로 뛰어갔다. 4시 공연인데 도착 예정시간이 3시 58분이라고 뜨니 늦지 않으려면 택시를 타야 하나 고민도 했다. 도착 예정시간에서 뭐 하나만 놓쳐도 실제로는 10분, 20분이 늦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빨리 도착하는 버스를 놓치지 않고 잘 탔고, 길이 좀 막혀서 불안했지만 다행히 환승 버스 도착 타이밍이 기가 막혀 시간을 단축했다. 마지막 도보 이동 구간은 빠르게 주파해 버리면 도착 예정시간은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 그렇게 겨우 네 시 1분 전에 내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늦어서 입장에 문제가 생길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청년이음센터에서 활동을 하다가 알게 된 청년의 공연이라 늦게 도착한다면 결례라는 생각에 더 초조했다. 어떤 공연이어도 늦지 않게 미리 착석하는 것이 공연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겠지만 아는 사람의 일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신경 쓰진 않았을 것 같긴 하다.
연극은 네 가지 단편으로 총 90분 구성이었다. 최근 지원 센터에서 얻은 기회로 연극을 몇 편 봤지만 그것들과는 또 색다른 느낌으로 좋았는데, 이번엔 뭔가 좀 더 전형적인 연극스러운 연극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여러 형태의 삶의 상황 속에서 인간의 여러 가지 본연적인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수한 연극, 그것들을 내 삶에 적용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저녁은 배우분과, 센터의 다른 청년분들이 두 분 오셔서 함께 하기로 했기 때문에 끝나고 집으로 가지 않고 배우 청년분이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 연극을 마치고 나오는 배우를 기다리는,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좀 뻘쭘했다. 곧 나오셔서 인사를 나누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인원이 다 모여 치킨집으로 갔다.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오랜만에 맥주도 좀 마시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일면식도 없던 이들과 잠시나마 서로의 운명선을 겹쳐놓고 각자의 시간을 공유하면서 조금씩 그 사람에 대해서 알아 가는 일은 참 신기했다.
단 게 먹고 싶다는 한 청년분의 말에 치킨집을 나서 이번엔 스타벅스로 갔다. 차를 마시면서 나는 별 쓸데없는 말이나 주절거렸지만 그것도 좋았다. 즐겁게 대화를 이어가다가 배우 청년분이 언니와 두 살 차이인 것을 저번에 듣고도 네다섯 살 차이 나지 않냐고 내가 얘기를 했을 때 그분 표정은 마음에 걸린다. 지겨운 인간관계 초입에 대한 실망이나 피로감, 냉소가 얼굴에 스친 것은 그냥 내 착각이었으면 좋겠다. 실수도 있었지만 한참을 얘기를 더 하다 보니 마감시간이 되어 파하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
나는 배우 청년분과 같이 지하철로 같이 가게 되었는데 대화를 좀 더 나누기 위해 동선까지 바꿔주시는 모습에 감사했다. 조금은 어색하기도 했지만 몇몇 내 속마음(감사했던 일, 멋있다고 느꼈던 부분)도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다. 내가 느꼈던 것에 대해서 당사자에게 표현하는 일도 참 괜찮은 일인 것 같다.
못다 한 얘기로 아쉬운 시간이었지만 지하철에서의 작별은 센터 프로그램을 하는 동안 여러 번 겪었기 때문에 다행히 익숙해졌다. 지원 사업은 이제 종료됐지만 앞으로 종종 기회가 된다면 이렇게 또 사람들과 계속 만날 수 있겠지.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