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잡소리부터 해야겠다.
한 스푼- 우산
오늘 아침에 비가 왔다. 나는 우산을 쓰고 학교 건물 주랑을 지나고 있었다. 천장이 있어서 비가 떨어지지 않으니 우산을 쓸 필요가 없어서 우산을 든 팔을 아래로 내렸다. 무거웠다.
그래서 그냥 비가 떨어지지 않아도 우산으로 머리를 가렸다. 우산대를 어깨에 기댄 채로 있어도, 기대지 않고 수직으로 들고 있어도 우산을 내리고 있는 것보다는 덜 힘들었다.
비가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도 계속 우산을 쓰고 있는 사람들은 멍청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똑똑한 사람들이었다.
두 스푼- 조회수
도서관에 있는데 <형이 결혼했다> 글이 조회수 1,000을 넘었다는 알림이 왔다. 2023년 9월 7일에 썼던 내 첫 글이 조회수 1,000을 넘은 것이 불과 얼마 전 일이었기 때문에 뜬금없이 '이게 무슨 일인가' 했다.
유입경로는 기타라는데 기타라는 건 무엇일까. 좋아요가 조회수에 어느 정도 비례해서 늘지 않는 걸 보면 유의미한 조회수는 아닐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나름대로 규칙적인 히스토리를 박살 낸 채 인기글 1위 자리로 굴러들어 온 <형이 결혼했다>
오늘 그래서 글 제목을 <누나가 결혼했다>, <동생이 결혼했다>, <아빠가 결혼했다>, 아내가 결혼했다 스핀오프로 <아, 내가 결혼했다> 이런 식으로 지어볼까 하다 말았다. 첫 문장은 "뻥이다."라고 하고.
조회수라...
세 스푼- 한강
작가 한강님이 2024년 10월 10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로 나도 덩달아 역사의 한 순간을 생생히 경험 중이다.
재밌는 점은 노벨문학상 수상 불과 그 며칠 전에 브런치스토리 "틈"에서 한국인 평균 연간 독서량에 대해 신랄하게 조명했는데 갑자기 며칠 사이에 우리나라에 한강 열풍이 불어버리는 바람에 "틈"이 좀 머쓱해졌다는 것이다. 머쓱한 "틈"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구경한 게 나는 재밌었다.
지금 현상에 대해서 이런저런 관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클라이밍이 유행해 준 덕분에 클라이밍으로 인생의 하루에 추억을 새길 수 있었던 나처럼, 한강이 유행해 준 덕분에 한강의 작품으로 추억을 쌓을 사람들이 있을 테다. 내 경험상 그건 좋은 일이다.
한강 열풍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은 그저 보존서고에서 「여수의 사랑」을 꺼내오게 되는 일에 지나지 않고 있지만, 멀리서 지켜보다 잠잠해지면 나도 원본이 우리말인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을 꼭 읽어볼 것이다.
마카롱과 레몬청
오늘 복지관에서 레몬청을 만들었다. 복지사 선생님과 몇 달 전에 면담하면서 내가 레몬청 만드는 걸 좋아한다고 했었는데 그걸 기억하시고 계셨다. 몇 주 전 "청년분들에게 레몬청 만들기를 알려주러 오시라."면서 내 시간에 맞춰서 모임 일정을 잡으셨다. 여러모로 안 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레몬청 사진을 찍다 보니 며칠 전 마카롱을 만들러 갔을 때 사진이 보였다. 디저트와 차를 나의 공간에서 만들어 먹는 삶이 속히 왔으면 하고 바랐다.
오늘 복지관의 조그마한 공간에서 새롭게 만난 은둔고립 청년들과 레몬청을 만들고,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작년 생각이 많이 났다. 어려운 순간이지만 힘겹게 짜낸 힘으로 빛을 향해 서툰 한 발을 내딛는 우리들의 모습은, 감사와 행복이 가득했다. 그게 너무 따뜻했고 좋았다.
만든 레몬청은 서울시 은둔고립청년 지원사업에 참여 중인 다른 청년들에게 나눠준다고 하셨다. 청년들에게 '자신이 생산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수 있는 기쁨'을 느끼게 해 주시려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알기론 그건 지고의 행복이다. 복지사 선생님 정말 일 잘하신다. 모임 분위기만 봐도 그랬다. 너무 존경스럽다. 나도 너무 행복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