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타임어택이에요."
다음 주 월요일부터 일주일간 시험기간이고 그래서 이제 슬슬 시험에 대한 공지가 확정이 되고 있다.
세 과목의 시험이 오픈북으로 치러지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난 오픈북 시험을 쳐본 적이 없다. 14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없었다. 작년에도, 올해 1학기에도 없었다.
생전 처음인 오픈북이 한 번에 세 개나 몰려온다. 오픈북은 뭘까. 어떻게 대비를 해야 할까. 알 수가 없었다. 저녁을 먹고 기숙사 방에 들어와서 막학기인 룸메에게 물어봤다. 오픈북 시험은 어떤 식으로 치는 거냐고.
"타임어택이에요."
교양 과목의 경우, 문항수가 많고 굉장히 지엽적으로 출제되는 경향이 짙다고 한다. 그래서 사실상 타임어택 게임이라고 한다. 외울 필요까지는 없지만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정도를 잘 알고 있어야 된다고 룸메가 친절하게 덧붙여서 알려줬다.
"감사합니다." 알려줘서 고맙다고 양치질하러 들어가면서 내가 이야기했다.
재미가 없다.
그래도 할 건 해야겠지. 하지만 재미는 없다. 재미가 없을 것 같다. 재미가, 없다.
+ 이상한 일
어느 날 친구와 캠퍼스를 걷고 있는데 전 날 수업에서 발표한 여자애가 지나가는 걸 봤다. '알게 되면 보게 된다"는 나의 이상한 법칙이 또 발생한 것이다.
그다음 날은 그 여자애 다음으로 발표했던 여자애를 봤다. 입트릴 하기를 민망해하던. 그쯤 되니 신기하지도 않았다. 이젠 이게 당연한가 보다 싶었다.
근데 오늘은 이런 생각을 했다. 처음으로 얼굴을 알게 된 사람들만 며칠 안으로 우연히 마주치게 되고, '새로 알게 된'의 유효기간이 지난 사람들은 잘 안 나타난다는 생각. 그러면서 그런 유효기간이 지난 사람들 중에서 나는 가창실기 수업에서 같은 팀이었던 여자애를 떠올렸다. 오늘 사진첩을 정리하면서 그 애랑 같이 서있는 사진을 봤던 것이 아마 암시가 된 것 같다.
그랬더니 그 생각을 하고 조금 있다가 생전 보지도 않는 학교 유튜브 영상을 보는데 그 애가 나왔다. 요즘 학교 야구잠바를 살까 말까 고민 중이어서 1년 전에 업로드된 학교 야잠 홍보 영상을 대충 넘기면서 봤는데, 그 여자애가 인터뷰 대상 중 한 명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 정도면 너무 억진데?'
뭐, 되도 않는 의미부여라든지 그럴 것이다. 시험 기간인 대학생의 정서 불안일지도 모르고.
되도 않는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이런 이상한 느낌을 처음 받았던 적은 고등학생 때다. 나는 내가 스스로는 대체로 모범적이었다고 생각하는데, 머리만큼은 정말 너무 기르고 싶어서 중학교 때 담 넘어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같이 담 넘어 다니던 여자애가 담에 치마가 걸려서 자빠진 적이 있다.
고등학생 때 기숙사로 돌아가야 되는 날 아침, 갑자기 뜬금없이 이 기억이 떠올랐었다. '재밌었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잊어 넘겼다. 그리고 그날 학교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으로 가는데 그 여자애가 택시에서 내렸다. 걔는 우리 동네 살지도 않는 데다가, 3년 동안 본 적도 없는데 하필 내가 걔 생각을 한 날 보게 된 것이다. 걔는 친구집에 놀러 온 거라 했었다. 이 때는 좀 많이 신기했었다. '이게 우연의 일치라고? 엄청난 확률이네.'
고등학교 때 윤리 과목 공부하면서 사르트르의 "인생은 B와 D사이의 C"라는 말을 좋아했다. 너무 절묘하게 잘 맞으니까. 벌쓰와 데쓰 사이의 초이쓰라니. 의미와 소리, 논리까지 모든 게 완벽하다.
오늘은 인생은 B와 D 사이의 C인데 C가 coincidence 라는 글을 봤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우연에 지배당하고 살지만 그 우연들은 나의 선택으로 뿌려진 씨앗들 중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역시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 어떻게 생각하세요?
마음 정리하려고 쓰기 시작한 일기가 산으로 가버리는 것도, 그런 글도 읽어주시는 분들에게도 이 우연의 의미는 도대체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