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3학년 2학기 중간고사 시작 첫날
이번에 시험공부를 많이 안 했다. 그런데 시험기간 직전 주말인 19,20일도 '뭣이 중헌디.'를 외치며 연달아 놀았다. 아무래도 스펙 덜어내기 대상 1순위로 지목된 "학점"보다는 인생 공부가 우선이지 않을까. 합리화가 아니라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되돌릴 순 없는 건 학점만이 아니다. 19일도 20일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되돌릴 수 없는 하루들이었다. 4.3점 한번 받고 나니 사실 그 정도까지는 안 해도 되겠다 싶어서 조금 해이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또 오픈북 과목도 많고 휴일이 많았어서 진도 나간 양도 적고, 외울 과목도 별로 없고 여러모로 뭘 공부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문제도 있었다.
오늘부터 금요일까지 하루에 하나씩 시험을 치르게 됐다. 화요일만 시험이 없다. 어떻게 운 좋게 그렇게 여유 있게 시험일이 정해졌다. 오늘 도서관에 출근했더니 시험기간이라 근로장학생들이 많이 없었다. 시험기간 근로시간표를 며칠 전 따로 제출했었고, 나는 평소대로 출근하기로 했지만 다른 학생들은 아니었나 보다. 사실 돈은 얼마 안 되지만 책임을 기르는 의미에서 나는 그렇게 했다. 내가 학생 나이가 아니기 때문인지, 학생의 본분도 본분이지만 도서관 근무자라는 역할이 있다면 동시에 그 역할도 충실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도서관 이용자가 시험기간 때문에 책 찾는 불편이 늘어버리면 안 되지 않나. 내가 담당받은 서가만이라도 관리가 잘 돼있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 오전에 출근한 근장생들은 세 명밖에 없었는데 정리해야 할 책은 평소보다 훨씬 많았다. 시험기간에 학생들이 책을 많이 빌려서 공부한 눈치였다. 반납된 책에 과제도서도 많이 있었다. '아, 나도 뺄걸.' 바로 본심이 나와버렸다. 일감이 평소보다 너무 많았다. 하지만 방법을 찾아서 정리를 빨리 하도록 했다. 북트럭을 평소보다 하나 더 써서 평소 내가 하고 싶던 방식으로 책 정리를 했다. 평소엔 선생님들이 알려준 방식에서 내 맘대로 그걸 바꾸기가 쉽지 않았는데(오자마자 나대는 거 같아 보이지 않겠는가) 오늘은 사정이 괜찮았다. 유치원 때부터 같이 일한 B랑만 같이 정리를 했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학생들은 지금의 방법이 어떤지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난 몇 군데 좀 바꿨으면 하는 포인트들이 있고. 일단 사리고 있다. 사서 선생님들이랑 라포 형성을 좀 더 하다가 그게 충분히 쌓이면 언제 한번 말씀드려 볼 생각이다.
그래도 '이게 훨씬 나은 거 같은데 왜 이렇게 안 하는 거야.'에 대한 욕구를 오늘 사람 없을 때 좀 풀었다.
그리고 퇴근하고 오늘 시험칠 과목 공부를 좀 하고 시험을 쳤다. <창업 경영과 기업가 정신>. 벤처 창업에 대한 혁신가 정신이라든지 창업 절차와 관련된 최소한의 법률 등을 이론으로 배우는 강의다. 수강신청하고 가장 많이 후회한 강의이다. 대충 중국 유학생이 수강생의 80퍼센트 정도 점유하고 있는 것 같은 강의이고, 80명이나 되는 학생들 중에서 강의시간에 정말 말 그대로 거의 '아무도' 강의를 듣지 않는 강의이다. 정말 오죽하면 뭔가 무서워질 지경이다.
근데 더 무서운 건 내가 이 강의에서 성적이 안 좋게 나올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오늘 시험을 치면서 든 것이다. 시험은 오픈북이고, 전자기기 사용가능이었다. 전형적인 '문제 내기 식' - 지엽적인 내용을 가지고 괄호 채우기나 단어 고르기 같은 수준으로 나올 거라고 예상했다. 문제를 받아보니 그런 형식이 아니었다. 서술형이었다. 1차로 당황했다.
더 이상한 건 분명히 문제는 두 문제뿐이고, 무엇을 묻는 것인지도 PDF 교재에서 내용을 찾기만 하면 정확하게 답과 매칭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보고 적으면 시험지 반도 쓸 필요가 없었다. 시간도 답을 손으로 쓰는 데 걸리는 시간 20분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게 너무 이상한 것이다. '정말 이거라고? 그럴 리가 없을 거 같은데 뭐지?'
하는 수 없이 질문의 답 이외에도 묻고 있는 것과 관련된 개념들을 앞에서 설명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내용을 불렸다. 시험지를 낼 때 보니 다른 학생들도 뭘 많이 써서 냈다. '오픈북이라는 걸 너무 쉽게 봤나? 뭔가 다른 자료를 가지고 다른 관점에서 자신의 생각을 쓰는 건가?' 온갖 찝찝한, 놓쳤을지 모를 가능성들이 떠올랐다. 혼자 공부하니 이런 게 안 좋다. 에타라도 했으면 출제 경향을 알았을 텐데.
아니면 그냥 정말로 이 강의 시험은 중국인 유학생들 한국어 손글씨 쓰기 능력 평가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PDF 교재 파일 12개 중에서 해당 내용이 어디에 포함돼 있는 건지 찾아내는 시험일 수도 있다, 난 파일명에다가 키워드들을 다 적어놔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 찾을 필요가 없어서 쉽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공부 안 하는 중국인 유학생들 수준에 맞춰 나오는 시험인지도 모른다, 긍정적인 가능성들을 모아보자면 이 정도이지 싶다.
성적 발표되면 두 가능성 중에 뭐가 진실이었는지 알게 되겠지. 신경 쓰지 말자. 세상에서 정말 나 혼자만 보는 진짜 비밀 일기나 쓰고 책도 읽고 스픽도 하던 대로 하고 수요일 칠 시험공부나 하자.
오늘은 갑자기 많이 추워져서 잠바라도 꺼내 입었어야 될 거 같은 날씨였다. 근데 캐리어에 넣어놨던 잠바에서 곰팡이 냄새가 나서 안 입었더니 목이 칼칼하고 컨디션이 좋지 않다. 저번에 만든 블루베리청으로 차나 타 마셔야겠다. 잠바 일로는 캐리어에다가 아무 대책 없이 옷을 오래 보관하면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뭐 하나 배웠으면 쓸모 있는 경험이다. 요즘 참 화가 없어지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