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불태웠다."는 흔한 표현으로 나의 여러 감정이 수렴해 버리는 것은 탐탁지 않지만 하얗게 불태웠다. 하연 재가 돼버린 내 몸을 누군가 옆에서 후후 불어주면 머리든 가슴이든 붉은 주황빛으로 빛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잔열이 느껴졌다. 그 잔열은 아마 지나간 시험 기간과 그 안에 깃든 내 미약한 고군분투에 대한 여운이었던 것 같다.
오늘의 시험은 시험 종료가 11시 20분이었다. 전자시계가 20분으로 바뀌고도 나는 20초 정도 더 서술형 문제의 답을 작성하는데 시간을 들였다. 서술형 문제들로 나올만한 것들을 예상해 보고 서술할 수 있도록 생각도, 문장도 정리해 놓았지만 막상 답안지에다가 문제에 맞춰서 적으려니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을 가다듬는데 시간을 빼앗겨 종료 1분 단위로 알뜰하게 시간을 쓰게 되었고 덕분에 마지막 말을 마무리하면서 휘갈겨 쓸 때는 정말 짜릿했다.
20분에 펜을 "탁!" 문제지 위에 내려 붙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천장을 향해 턱을 쳐들었다. 아직 답안지 작성을 하고 있는 수많은 학생들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낮고 깊은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후... 끝났다.'
앞자리의 여학생은 많이 썼는지 답안지가 부족해 한 장 더 가져오기도 했었다. 23-2학기와 24-1학기까지만 해도 그런 것을 볼 때 눌리는 느낌이 있었고 그런 감정에 대한 것을 소재로 글을 쓰기도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1년 동안 글을 쓴 보람이 있다면 아마 오늘의 이 감정이 아닐까.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감. 별 것 아닌 것이 된 과거의 두려움을 바라보는 승리자의 여유. 시험지를 꽉 채울 수 있을 정도의 글쓰기 능력, 생각하는 능력이 아주 조금 생긴 것 같아서 기뻤다.
시험장을 나와서 오랜만에 학교 산책을 했다. 이번 시험기간에는 산책과 운동을 아예 빼버렸다. 여러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는 것이 쉽지가 않아서 운동 토끼를 살려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아마 다음 주부터 기숙사 헬스장에 가면 들던 무게가 힘들게 느껴질 것 같다.
산책을 하는 동안 수잔나랑 통화를 했다. 수잔나는 40분 가까이 자기 이야기를 했다. 예뻤던 시절의 이야기, 인기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 수업에 대한 불평, 신변잡기 등을 이야기했다. 어차피 산책 중이라 딴 걸 하지 못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가지지 못했을 기꺼운 마음으로 들었다. 그랬더니 마지막에는 수잔나가 나를 응원하는 말도 몇 마디 해줬다. 보상이라면 보상이다.
날씨가 며칠 만에 참 따뜻해서 좋았다. 햇살도 그랬다. 출근이나 등교 시간에 맞춰서 제한된 시간으로 하는 산책도 아니어서 좋았다. 시험이 끝나고 마음의 평안이 찾아온 후 하는 산책이어서 그런지 더더욱 좋았다. 산책을 끝내고 기숙사 앞 벤치에 가방을 베고 누워서 좀 쉬었다. 햇빛도 쬘 겸. 완벽한 오후였다.
어제 이야기
어제도 시험을 봤고, 굉장히 불친절한 시험이었다. 그런데도 다들 서술형을 잘도 많이 작성해서 내길래 아는 친구를 붙잡고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물어봤었다. 자기는 그냥 관련 내용을 인터넷과 챗GPT를 이용해 따로 공부를 했다고 말했다. ppt 분량을 체크해서 문제가 지엽적으로 나올지 어떨지도 예측을 한다고 했는데 그걸 들으면서 '학생들이 생각보다 분석적으로 시험에 접근하고 있구나'라는 걸 알게 됐다.
나도 그렇게 하긴 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ppt만으로 학습이 안된다는 것이 느껴지니 책을 찾아보고 생성형 AI 선생님을 많이 의지하면서 진짜 공부가 될 수 있도록 보충 수업을 자발적으로 한 것이었다. 근데 그걸 나만 하는 게 아니라 다들 하고 있다는 게 좀 의외였다. 성적이 좀 잘 나오면서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은 나만큼은 안 하나보다.'하고 약간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아마 운이 조금 더 좋았거나 조금 더 잘 외운 데서 온 차이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찌 됐건 애초의 내 생각보다 공부의 본질적인 의미를 생각하는 학생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역시 참 다들 공부 잘한다.
[변액보험판매관리사를 하려면 생명보험설계사 자격이 있어야 된다] 이런 부분은 그냥 교수님이 쳐다도 안 보고 넘긴 페이지에 있는 내용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문제로 출제가 되어 나왔던 게 기억난다. 그 문제는 틀렸다. 그런 것도 재밌었다. 툭하면 지각하고, 맘대로 휴강하고 과제로 대체해 버리면서 수업 끝나면 학생들보다 먼저, 제일 먼저 서둘러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교수님. 그러면서도 강의 시간에는 인간 자체에 탑재된 특유의 유쾌함으로 학생들을 곧잘 웃게 만드는 미워할 수 없는 교수님 다운 출제 스타일이었다고 할까.
또 재밌었던 부분은 OX문제에서 틀리면 감점이 된다는 것이었다. 겁을 준 것 치고는 틀렸을 때보다 맞았을 때 기댓값이 더 크기 때문에 찍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개념을 보고 개념에 대한 서술을 하는 것과, 서술된 개념을 보고 개념을 적는 것의 두 가지 출제 형식에서 압도적으로 앞의 것이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공부라는 건 앞의 것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뒤에 것은 그냥 문제 풀이로 지나가는 것 같다. 시험은 근데 또 뒤에 것으로 많이 나온다. 그래서 난 시험을 좀 힘들게 준비하는 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시험만 보고 말 거면 좀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데 의미가 중요하다 보니 이렇게 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