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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뇽이 Jan 04. 2024

히키코모리 회복 일지

복귀 유저 보상

 기숙사는 가끔 집이라고도 부르지만 대체로 '기숙사'나 '방'이라고 하는 느낌이고, 종강 후 드디어 28일 새벽에 의정부 누나 집에서 함께 출발해 세 시간가량 걸려 '집'에 도착했다. 내 방의 여유와 안락함을 해치는 캐리어부터 숙청시키고 싶어서 얼른 풀어서 정리를 했다. 캐리어는 팬트리로 집어넣어버리고 오랜만에 주방의 고동색 원목 식탁에서 느긋하게 식사를 했다. 어릴 때부터 집에서 오래 썼던 식탁이 지금 식탁으로 바뀔 때만 해도 정이 안 가고 싫었는데 이 녀석은 보란 듯이 그 자리를 완벽하게 대체를 해냈다.    


 아버지 지인이 만드셨다는 식빵은 양파맛이 나는 것 같았는데 크림치즈랑 먹으니 어니언 베이글 같기도 하고 너무 맛있었다. 거기다가 아버지가 내려주는 커피도 오랜만에 마셨다. 새벽에 나오느라 아침을 못 먹어서 그랬는지 편안한 집이라서 그랬는지, 아빠에 대한 반감과 원망이 꽤 사라져서 그랬는지 아무튼 그 식사가 참 좋았다.

 

 허리에 프롤로 주사를 맞은 지 3일 차기도 했고, 마지막 상담에서 선생님께 들은 말도 있고 해서 이번 연휴에는 조카들을 일부러 좀 덜 돌보고 나를 위해 쉬었다. 그래도 너무 쩨쩨하게 굴자니 그건 그거대로 또 마음이 불편해서 욕조 광내기-'첨벙첨벙' 물놀이- 목욕 코스는 원래대로 정상 운영했다.


 30일에는 어릴 때 자주 가던 산에 일출을 보러 갔다. 아버지 은퇴하시고 조금 떨어진 도시로 이사하느라 거리가 생겼지만 예전에 20년 넘게 산 집 바로 뒤에는 임진왜란 때 전쟁을 치른 산이 있다. 그 산엘 아주 어릴 때부터 아빠를 따라서 매일같이 다녔었다. 개발과 오염으로 조금씩 변해갔지만 내가 개구쟁이 꼬마일 적, 그곳에는 새우와 가재가 사는 물이 흘렀다. 아빠랑 같이 산딸기를 따먹기도 하고 겨울에는 가족들과 스케이트를 타기도 했다. 친구들과는 눈썰매를 타러 올랐다가 정상에서 하산 길을 잃어 헤매기도 했다. 5학년 때 현실을 알고 변해버린 천사 같던 여자애는 그 산 정상에서 엄마와 화석을 찾았다고 수줍게 자랑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불과 얼마 전까지 그 산을 내 죽을 장소로 점찍어놓고 살았다. 언젠가 한 번은 올라가다 힘들기도 하고, 또 막상 진짜로 죽자니 겁이 나서 중간에 내려왔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내 우유부단함이 없었다면 지금의 행복도 없었을 것 같다. 이번에 집으로 내려갈 날짜가 정해질 때쯤부터 막연하게 거기서 일출을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무래도 과거의 원망과 분노, 후회와 부끄러움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은연중에 있었던 것 같다. 


 전 날 밤에 아버지한테 차를 쓰겠다, 산에 가겠다고 알려드리고 새벽 5시에 일어났다. 높이 400미터 밖에 안된다고는 해도 그래도 새벽 등산이니 대비는 좀 하고 가야 될 것 같아서 주방으로 갔다. 주방 아일랜드 위에 있던 바나나 하나와 엄마 친구분께서 만들어 보내주신 경주빵 하나, 던킨 도너츠 약과 하나랑 500ml 생수병 하나를 챙겨서 힙색에 집어넣었다.   


 차를 타고 30분을 가서 옛날 집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곧장 산으로 향했다. 이후에 1월 1일에 북한산 등산을 할 때 알게 된 거지만, 서울의 산들과 다르게 지방의 동네 뒷산은 산악 가로등이 없어서 깜깜했다. 혼자기도 하고 게다가 산책로 초입에 무덤이 있는 걸 잊은 바람에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 너무 무서워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때는 뛰었는데 그러다 보니 일출 시간보다 정상에 너무 일찍 도착해서 땀이 식어 추위에 떨었다. 정상 한 봉우리 남겼을 때는 전탑 관리하느라 생긴 발길에 속아서 길이 아닌 곳으로 들어 20분 정도 헤매기도 했다. 되돌아보니 위험하고 참 대책 없었다 싶은데 다음부턴 그러지 말기로. 

해님을 기다리면서 반대편 달님과 시간을 보냈다.


살면서 처음으로 본 일출 (떠오르는 모습은 동영상 촬영을 했는데 내 목소리가 너무 많이 들어갔다.)

 시뻘건 태양이 빼꼼 얼굴을 들이미는데도 그 모습이 너무 거대하고 압도적이어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동시에 따뜻하고 밝아서 안도되는 감정도 있었다. 핸드폰 플래시 하나에 의지한 새벽 산행으로 죽음의 골짜기 체험을 한 탓인 것 같다. 

 

 일출 사진도, 셀카도 많이 찍고(자기애가 많이 생겼다) 충분히 순간을 즐긴 후에 하산했다. 하산할 때는 중간부터 쉬운 코스로 내려와서 한결 수월했다.                 

하산하면서.

 이번 학기에 8년 만에 집에서 나와서 그동안 멈춘 인생을 용기 있게 다시 시작한 나에게 자애로운 어머니 지구께서 선물을 많이 주셨다. 복귀 유저 보상인가? 인생 우편함이 보상으로 가득 찼다. 기억나는 것들을 잊지 않게 적어볼까.


 버스에서 노래를 듣지 않고 고립은둔청년 지원사업 라디오 홍보를 들었고, 그곳에서 좋은 선생님과 청년들을 만났다. 즐겁고 유익한 활동과 경험도 많이 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상담 선생님에게 상처를 받기도 한다는데 나는 상담 선생님이 너무 좋으셨다. 심지어 마지막날 알고 보니 동향에 잘 아는 동네분이셨다. 또 학교에서, 체육관에서, 병원에서 나를 응원해 주는 어른들을 만났다. 학기 초 도서관의 이달의 도서 주제는 지친 청년들을 위한 위로였다. 거기서 빌려 읽은 책들에서 많이 배웠다. 가장 일찍 열린 과목의 첫 강의는 동기부여 연설 영어 듣기였는데 혼자 기숙사 방에서 외롭고 두려워하던 나에게 큰 위로와 감동을 줬다.


 보내주신 것들을 잘 받아서 다음 학기와, 남은 인생을 다시 걸어가는데 보태서 잘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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