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 할 것, 해야 할 것, 해야 할 것
오늘은 수강신청 망한 날. 내 기억으로는 이번이 좀 역대급으로 망한 거 같다. 기분 탓일까. 사실 내 인생 수강신청의 초반 회차들은 14년 전 일이라 기억 자체가 안 나긴 한다.
7번째 수강신청을 해 본 오늘, 처음으로 pc방에서 수강신청을 했다. 기숙사에서 노트북으로 할까 하다가 기숙사 와이파이로 하는 게 가장 안 좋다는 글을 보고 방에서 '갈까 말까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갔다. 심지어 피시방 가는 길에도 '돌아갈까' 발걸음을 다시 방으로 돌렸다가 결국은 피시방으로 향했다. 별것도 아닌 걸로 왜 그렇게 고민했냐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그렇게까지 하는 간절함'이 없이 살아온 내 태도를 한번 거슬러 봐야 한다는 마음 사이에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느낀 것이지만 나는 정말 간절함이나 절박함이 없다. 이렇게까지 인생이 소위 터졌는데도 왜 이렇게 계속 안일하게 사는지 모르겠다. 놀 거 다 놀고 쉴 거 다 쉬고 하면서 말이다. 나는 어떻게 되려는 걸까 걱정이다.
한파를 절감하면서 도착한 pc방에는 4학년 학생들이 많았다.(학년별로 수강신청 일자가 다르다.) 수강신청을 해보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들이 수강신청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수강신청을 하면서 내 컴퓨터 너머에서 들려오는 키보드와 마우스 소리를 들은 것이지만. '아, 수강신청은 저렇게 하는 거구나, 저 정도 리듬으로 해도 될까말까구나.'하고 알 수 있었다. 그걸 수강신청이 이제 앞으로 한번 남은 시점에 알게 된 건 좀 너무한 것 같기도 하다.
희망과목 담아놓은 내역에서 신청 버튼을 클릭한 후 esc를 누르고 다음 과목에 신청 버튼을 누르는 식으로 연타를 해야 되는 걸 까먹고 신청 후 확인창이 뜨는 것을 기다리다가 교양 과목 침 발라놓은 것들을 다 흘렸다. 전공보다 교양부터 먼저 클릭해야 되는 것도 까먹고 4학년이라 자리가 선점이 되는 전공부터 클릭한 것도 뼈아팠다.
망연자실한 상태에서 pc방의 폭신한 의자에 멍하니 앉아있다가 그냥 아무거나 매물이 남아 있는 과목들을 주워 넣었다. 많이 슬펐는데 그냥 눈 딱 감고 '그냥 한 학기 살다보면 또 지나갈 거야.'하고 마음을 먹었다. 지금까지 그랬으니까. 그래도 여름방학 때 하게 될 수강신청에서는 제발 까먹지 말아야 할 것들을 메모장에 남겨놨다.
분노하는 지점은 지능이랑 관련 있고 반박하는 지점은 결핍과 관련이 있다는 말을 봤었는데 공감이 많이 됐다. 생각해 보니 내가 강하게 반박했던 때는 내 결핍을 채워주던 것을 지키기 위할 때였고, 화가 불쑥불쑥 올라왔을 때는 내가 멍청하게 무언가를 놓치거나 모르거나 할 때였다. 오늘 수강신청 건으로도 화가 나고 우울해지는 걸 느꼈다. 또, 오늘 저녁에만 해도 세탁기앱 결제 인터페이스가 바뀐 거 때문에 헤매다가 화가 올라오는 걸 참느라 힘들었다. 못 한다고 생각하니까 더 못하는 것 같은데 극복을 언제쯤 할 수 있을지. 읽어보고, 눌러보고 하면 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실제로 이런 영역에 지능이 떨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게으르고 절실하지 않아서 대충 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9시 언저리에 도서관 출근하면서 사진을 종종 찍다 보니, 도서관 건물에 비치는 그림자의 위치가 많이 달라지는 걸 알 수 있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걸 일깨워 주는 하나의 장치이다. 나도, ... 나도 어딘가로 잘 흐를 수 있다면 좋겠다. 좋은 습관으로 막아놨던 자리에 다시 나쁜 습관들이 돌아오니 모든 게 엉망이다. 생활도, 마음도. 좋은 습관부터 되찾아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사소한 해야할 일들을 체크박스로 메모해놓고 모두 했다. 조금 마음이 편하다. 마음만 편하게 먹고 문제별로 처리 방법들을 설정해서 그대로 하면, 내가 지금도 걱정하고 있는 일들(이사, 25-1학기, 장학금, 관계 등)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왜 이렇게 아무 것도 하기가 싫은지 참. 그래도 힘내야지 어쩌겠나.
한파긴 한파다. 밖에 나가면 손이 갈라지는 듯 시리고 기숙사 방 책상에 앉아 있으면 외풍과 우풍이 느껴진다.
이 추운 날들을 건강하게 잘 났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