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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뇽이 Jan 07. 2024

히키코모리 탈출 일지

세상을 더듬는 중

 살면서 해본 게 별로 없다. 어릴 땐 돈이 없었어서 그랬고, 성인 되고는 인생 3분의 1을 칩거했으니 '살면서'라고 하기조차 애매하고 그러니 해본 건 더더욱 있을 리가 없다. 이 시기에 내가 조카들과 할머니를 돌본 '경험'을 한 것에 대해서 나를 부러워하는 청년도 있긴 했다. 자기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며. 


 뭐가 어찌 됐건 그래도 최근에는 돈을 쓰는 죄악감에서 벗어나 조금씩 뭘 해보려고 한다. 인간 구실 해보려고. 목록들은 이미 머릿속에 들어 있어서 조금씩 조금씩 하면서 지우고 있다. 


 그중에 하나가 좀 허무하지만 서브웨이 가기가 있었다. 기계치이기도 하고 어릴 때부터 정보나, 기술 문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브웨이뿐만이 아니라 키오스크 자체가 처음엔 두려움의 대상이었는데(젊은 사람이 기계 앞에서 쩔쩔매면 누가 나를 히키코모리인 줄 알까 싶었다.) 몇 번 시도하니 별 거 아니었다. 


처음에 도움이 된 상상 

1. 나는 얼마 전 냉동에서 깨어난 인간이다. 

2. 나는 얼마 전 코마 상태에서 회복해서 나왔다. 

3. 나는 치매나 기억상실이 왔다.

4. 나는 '해바라기' 오태식이다. (교도소에서 장기 복무 후 출소했다.) 

5. 나는 '별에서 온 그대' 도민준이다. (외계인이거나 과거에서 왔다.) 


 그리고 브런치에서 외국에서 오랜만에 귀국하신 분이 처음 키오스크로 주문해야 될 때 막막하고 부끄러웠다는 글을 봤었다. 꼭 히키코모리가 아니어도 헤맬만한 사정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싶어 용기를 가졌었다. 고립은둔 청년 지원 사업 선정 면담 때도 이런 부분들이 두렵다고 하니 몇 번만 해도 그런 건 괜찮아질 거라고 하셨었지.


 근데 서브웨이는 조합을 여러 가지 해야 한다는 느낌이 있어서 난도가 높을 것 같았다.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그동안 좀 미루었다. 갈까 말까 하면서 매장까지 들어갔다 그냥 나온 날도 며칠 있다.   


그러다 아침에 배봉산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 숙제 목록 하나를 쳐냈다. 다행히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없어서 느긋하게 조합을 짰다. 수프와 음료까지 포함한 세트로 주문했는데 음식 받을 때 빈 컵을 뒤집어서 주길래 뭐냐고 물어봤더니 음료 컵이라길래 '아, 셀프구나. 하나 헤매긴 했네.' 하고 생각했다. 


 너무 별 거 아니라 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 같다. 서브웨이 검색만 해도 꿀조합도 나오고 홈페이지에는 이용 방법, 재료 설명까지 친절하게 다 나온다는 걸 이제 알았다. 내 인생은 서브웨이 하나 가지고도 이렇게 재밌게 살 수 있어서 이득인 부분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처음엔 아무도 볼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 쓰고, 발행을 시작한 글이지만서도 혹시라도 나 같은 분들이 이 글을 보게 될 수도 있다면 어떨까. 세상을 더듬거리면서 배우는 나의 이런 시행착오가 어떤, 아주 디테일한 안내서의 역할도 할 수 있을까. 


길 찾기는 네이버 지도앱으로 목적지를 검색해서 화면을 확대하면 자세한 동선까지 전부 알 수 있답니다.

자세히 보면 앱에 버스 정류장 번호도 다 나오고 실제 정류장 번호랑 체크하면 잘못 갈 일도 없답니다.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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