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지난 목요일에는 마지막 집들이 팀이 다녀갔다. 오후부터 저녁 늦게까지 함께 있으면서 산책도 하고 식사도 하고 많은 대화도 나눴다. 감사함을 더 많이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말들을 많이 들었고, 삶 속에서의 여러 관계도 목격하게 되면서 감정적으로 풍성한 하루였다.
금요일에는 9시부터 5시 45분까지 공강 없이 강의를 듣는 날이다. 두 번을 겪어보니 식사 시간이나 체력이 문제가 되지는 않는데 노트북 배터리 관리가 문제가 되고 있다. 중간에 충전할 시간도 없고 장소도 없어서 절전 모드로 최대한 사용을 줄이면서 버티고 있는데 남은 한 학기 동안 꽤나 불편할 것 같다.
금요일의 마지막 강의인 [클래식 음악 산책] 시간에는 강의 시간 전 쉬는 시간부터 강의 도중 쉬는 시간까지 교수님이 강의와 관련된 음악을 들려주신다. 그것만이면 괜찮겠는데 음악에 관련된 설명도 계속 곁들이셔서 사실상 쉬는 시간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가위바위보로 팀플 조장을 정할 때는 중국인 유학생과 둘이 남아서 최종전을 벌였는데 그 결과 유학생이 걸렸다. 중국인 유학생에 대한 편견이 있기는 하지만 그 편견을 행동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기 위해서 조장을 하려고 하는지 어쩌는지 가만히 반응을 지켜봤다. 편견은 틀리지를 않았고 유학생은 못하겠다는 말을 했다. 그래서 나는 "그럼 제가 할게요."라고 준비하고 있던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유학생이니까 여러모로 어려움이 있다고 빼달라고 말했다면 기분 상할 일은 없지 않았을까 싶다.
중국인 유학생 이야기에서 이렇게 이어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금요일 저녁에 둘째 누나 집에 갔다. 둘째 누나네도 나와 며칠 차이로 2월 중에 이사를 했었다. 작년 2학기에는 한 번도 가질 않았기도 해서 한 번 가려고 하고 있었는데 조카가 설사병이 났다기도 했대서 도와줄 게 있나 하고 즉흥적으로 출발했다. 도착해 보니 이사한 아파트는 굉장히 깔끔하고 좋았다. 그 깔끔한 집의 거실 창으로는 주변의 굉장히 많은 신축 아파트들과 오래된 빌라단지가 동시에 보였다. 누나는 이 동네 빌라에는 중국인들과 다문화가정이 많이 살고, 주변 지인들 중에는 자신의 자녀들이 그들과 같은 학교를 다니지 않기를 바라서 가까운 옆 학교를 배정받을 수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기도 한다고 말했다. 다음 날인 토요일, 조카와 아파트 놀이터에 놀러 갔었다. 한 초등학생 형제가 중국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다른 한 초등학생이 자기 무리 속에서 노래를 불렀다. 하츄핑 노래였는데 중간중간에 시진핑으로 개사가 된 노래였다. 마오쩌둥은 추임새로 들어갔다. '어제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거짓말처럼 이렇게 바로 현장을 목격한다고?' 혼자 속으로 쓸데없는 감탄을 했다. 조카를 데리고 마침 그 2대 3으로 분열된 집단 사이를 지나가는 길이었어서 3쪽 초등학생에게 놀리지 말라고, 그거 잘못된 행동이라고 말을 했다.
멋 모르고 기세 좋던 아이는 시커먼 아저씨가 와서 뭐라고 하니 그래도 뭔가 본인이 잘못했다는 걸 알았는지 표정에서 기세가 꺾이고 주눅이 들더니 "죄송합니다." 소리를 했다. 나한테 미안할 건 아니지만 두 마디에서 말 수를 더 늘리고 싶지는 않아서 아이의 부모는 어떤 사람일지 상상하면서 그냥 그대로 지나치고 있었다. 그제서야 동생 눈치를 보며 사랑의 시진핑 노래를 내내 가만히 듣고만 있었던 덩치 좋은 형이 자기네 형제를 놀린 아이를 향해 말을 했다. "그래 맞아, 내가 안 참았으면 넌 처맞는 거야."
그 순간 인터넷에서나 보던 브랜드 아파트, 빌라 아이들 간에 차별 문제라든지,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한국 사회에서 겪는 차별 문제라든지 하는 것들은 사라졌다. 그때까지 그것들은 나의 이성적인 곳에 있는 이슈였다. 동생과 이야기할 때의 중국어가 아닌, 완벽한 한국어 억양으로 참았던 말을 하는 것을 들으니 머리가 아닌 가슴에 충격이 왔다. 너무 한국인 초등학생 그 자체였다. 그게 당연한 걸 나도 그제서야 알았다. 이도 저도 이면서 이도 저도 아닌 그 어린애는 모든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소수파이기 때문에 애써 모르는 척 동생과, 하츄핑 노래를 부르는 아이를 자신 없는 눈빛으로 번갈아 보기만 했던 것이다. 그게 너무 슬펐다. 똑같은 아이인데 그동안의 인생에서 도대체 어떤 싸움을 해왔을까. 참 그렇다.
토요일 오후에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가겠냐는 목사인 매형의 말을 거절하지 못해서 오늘 2부 예배에 참석하고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매형이 목사님이어서 거절하지 못한 것은 아니고 형이어서, 남자여서 거절하기 힘들었다. 성도들이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호의호식하고 여신도들 성추행 하고 보수 꼴통이거나 전과자들이 신분 세탁하는 직업이라는 편견도 꽤나 있는 직업을 가진 매형이지만 실제로는 워라밸 따위 개나 줘버린 고강도 업무에 수년 째 시달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집에 돌아오면 조카랑 놀이 시간도 가지고 목욕도 시키고 여타 집안일도 한다. 누나도 전업 주부가 아니다 보니 집안일 분담을 피할 수는 없지만 정말 숨쉴틈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인생이다. 그런 매형이 웃으면서 너무 재밌는 일을 추천하는 것마냥 내일 예배드리고 갈래라길래 거절할 수가 없었다. 또, 목사 아들이면서 스무 살부터 본격적으로 교회를 안 가고 믿음도 없는 나를 교회에 살짝살짝 적셔주면 언젠가는 내가 다시 하나님 곁으로 돌아올 거라고 믿는 그 희망을 뺏고 싶지도 않았다. 일요일이 되어 교회를 갔다. 마지막으로 같이 갔을 때는 유아부였던 조카는 어느새 유치부 예배실에서 엄마와 떨어져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그래서 누나와 나는 함께 본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마치고 나는 누나가 챙겨준 빵이나 카레, 쿠키, 안 쓰는 가스버너 하나 따위를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계획했던 주말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크게 상관있을까 싶다. 이번 주가 아니었으면 앞으로는 더 힘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