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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뇽이 Jan 14. 2024

히키코모리 탈출일지

유치원 근로 1주일이 지났다

나는 6남매 중 다섯 째이다. 내 바로 위는 두 살 터울의 형인데, 형까지는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을 다녔다. 나부터는 더 이상 방법이 없었는지 어쩠는지 모르지만 나와 내 동생은 유치원을 다니지 못했다. 대신 최소한의 어떤 홈스쿨링에 가까운 것을 하긴 했다. 그런 활동들 중에서 원어로 된 디즈니 비디오들을 동생과 함께 보고 또 봤던 기억이 많이 난다. 나는 그중에서도 미녀와 야수를 가장 좋아했고 지금도 가끔 "Beauty and the Beast" 나, "Be Our Guest"를 듣곤 한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친구들이 당연히 전부 유치원을 다녔고 '유치원 친구'가 있다는 것에 소외감을 느꼈다. 학창 시절 내내 친구들과 잘 어울렸으면서도 평생 스스로 고독하게 여기는 내 습성은 이미 여기서부터 시작된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냥 어떤 소설에서 나온 말처럼 "원래 본성이 고독해서 조개나 달팽이처럼 자기 껍질 속으로 기어들려는 사람들"에 내가 해당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찌 됐건 유치원에 다니지 못했던 사실은 꽤 오랫동안 우리 집의 가난과 관련된 내 콤플렉스 중 하나였다.

 

이번 주 금요일에 퇴근을 하면서 유치원 정문을 열고 나왔더니 시원한 겨울 공기가 맛있었다. 그런 공기 속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공기까지 아이스크림 같이 느껴져서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인생에서 찾은 이스터에그 중 하나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숙사로 향하는데 문득 '그러고 보니 나 유치원을 다니고 있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더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가 어떻게 됐든 '유치원을 다닌다.'는 문장에서 틀린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근로장학 알바의 형태이긴 하지만 유치원을 다녀서 좋다. 나에게도 처음으로 '유치원 친구'가 서른네 명이나 생긴 것이다. 출근 첫날 레고를 같이 했던 똑똑한 여자애는 목요일쯤에 '출신'(내 사투리 억양 때문에 선생님과 출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이라는 단어를 듣더니 나에게 와서 자신의 어머니가 서울대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역시나,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과 함께 왜 지능이 많이 높은 사람은 얼굴에서 티가 나는 것인지 신기하고 궁금했다. a.i 에게 물어봐도 이는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위험하고 근거 없는 일반화라고만 한다.


그 아이의 어머니의 출신 대학 같은 것뿐만 아니라 모두의 성격이나 심성, 좋아하는 활동, 좋아하는 간식, 잘하는 것, 사이가 돈독한 친구와 앙숙인 친구 등 많은 것을 알게 됐다. 겨우 일주일이지만 아침 9시부터 오후에 하원하기 전까지 함께하는 시간의 파급력은 상상보다 컸다.


금요일에 아이들 점심시간을 보조하는데 아이들의 질문세례가 쏟아졌다. 선생님은 거짓말을 얼마나 많이 했길래 코가 그렇게 길어졌냐는 둥, 얼굴에 점(주근깨, 여드름 흉터, 점을 보고)이 왜 이렇게 많냐는 둥, 수염이 왜 귀까지  자라냐 그러다가    


"선생님은 우리한테 존댓말을 해요?", "선생님은 어떻게 우리 이름을 다 알아요?"


같은 내 가치관을 건드리는 질문도 받았다.


"그러면 너네 기분이 더 좋잖아요.", "부르고 싶으니까 알죠."


하고 대답했다. 나는 내가 어려서부터 고통받고 생각이 많았어서 그런지 어릴 때의 기억이 많다. 그래서 내 아이 때의 마음이 기억이 난다. 괴로움이 없었다면 기억도 없었을 건데 괴로움이 역설적으로 축복이 된 것이다. 그 마음들을 간직하고 아이들을 대하고, 때로는 키우기도 해 보면서 지금까지 근 20년 동안은 백전불패다. 그것은 우리 학교의 강사인 소설가 분의 표현을 빌려서 이야기하면 내 '초능력'인 것이다.


놀아'주는' 것이 아니라 같이 놀고, 완성된 인격으로서 존중하면서도 미숙한 지능체를 돕고 보호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아이들은 좋아한다. 전문가가 아닌 소위 '야매'의 방식이라 그런지 이 방식은 체력이 좀 요구되긴 한다. 그래도 다른 어른들도 체력이 따라준다면 아이들에게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다.


"선생님, 유치원에 항상 있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선생님 중에서 제일 좋아요."


아이들이 진짜 선생님 앞에서 알바인 나한테도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는 것이 겸연쩍긴 하지만 저런 말을 들을 때 눈물이 날 거 같은 기분이 든다. 희망 근로지에 유치원 쓰길 잘했다. 조카들 똥기저귀 갈아주고 할머니 똥기저귀?(높임말로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갈아줬던 실력을 유치원에서 처음 써먹게 됐을 때는 약간 당황했지만. 역시 사람은 잘하는 걸 해야 되나. 이 재능을 어떻게 살려야 한담. 행복한 설레발을 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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