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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뇽이 Feb 05. 2024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행복하다

<히키코모리 탈출 일지>라는 제목이 더 이상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요즘 하고 있다. 탈출은 무사히 해낸 것 같아서. 마음이 밝아지던 동안에도 나에 대한 불신이 종종 나를 찾아왔지만 이제는 나에 대해 긍정적인 확신이 생겼다. 그래서 지난번부터 제목을 바꿨다. 세상에 적응을 열심히 하고 있으니 <히키코모리의 사회 적응기> 같은 제목을 떠올려봤지만, 늘 별 시답잖은 이야기나 적는 내 일기장 같은 느낌이 강해서 지금의 제목으로 정했다.


요즘은 인생 처음으로 행복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순간순간의 행복은 느낀 적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어느 기간 동안 행복해보긴 처음이다. 매일 아침에 눈을 떠서 스트레칭을 10분~15분 한 후 일어나서 물을 마시고 세수를 하며 삶에 감사하다고 말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느껴진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나에게는 "이쁘다~ 이쁘다"라고 말해주는데 이것도 역시 도움이 된다. 배운 건 잘 실천해야지!


가끔은 자조모임에 가면 내가 너무 걱정이 없고 행복해서 괜스레 사람들에게 조금 미안할 때도 있다. 누군가는 여전히 불안하고 혼란스럽고,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삶이 저에게 이 마음을 주는 대가로 인생의 가장 꽃다운 시기 10년을 받아 갔습니다. 혼자 먼저 행복해져서 미안하지만 이해 좀 해주세요.'  


속으로만 생각한다.


그저께는 모임 멤버들과 스키장을 다녀왔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지금부터 인생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당당하게 하면서 살자 싶어서 2024년에 학교 보드동아리에 용기 내서 가입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모임에서 한 청년분이 스노보드를 타러 가고 싶어서, 탈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다는 말을 듣고 너무 반가웠다. 무조건 가겠다고 즉답을 드렸고 나를 마지막으로 그분의 마음속 인원 수가 다 모였다. 그렇게 두 주 정도 지나 일정이 2월 3일 토요일로 잡혔고 마침 유치원 근로가 종료된 다음 날이어서 마음 편하게 다녀왔다. 어쩌다 보니 플렉스처럼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어 재밌었다.


'그래, 이건 돈으로 사는 확실한 행복이다.'


돈확행도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고, 덕분에 공부도 해야 되지만 열심히 일도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보드도 역시 축구, 농구와 마찬가지로 8년 전에 마지막으로 탔다. 그리고 구력에 비해 보드는 경험이 아주 적기 때문에 어느 정도 걱정을 했다. 그래도 농구를 8년 만에 다시 해봤을 때 머슬 메모리의 위대함을 체감해서 마음에 여유가 있었다.


'탈 수 있겠지 뭐~'   


그리고 타보니 생각했던 것 보다도 훨씬 잘 탔다. 중급 슬로프에서 첫 보딩을 한 번도 안 넘어지고 성공한 것이다. 인체는 정말 신비하구나 느꼈다. 이게 된다고?


스키장에서는 하루종일 너무 행복해서 조증처럼 웃고 다녔다. 혼자였으면 다음 겨울까지 기다렸을 텐데 청년분들 덕분에 너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감사하다.



스키장. 나는 스무 살 때 같은 과 학술 동아리(라고 쓰고 술 마시는 동아리) 친구들과 처음 갔었다. 동아리 중에서도 친한 패거리가 있었는데 그중 한 친구가 리조트 건설 당시 투자자였던 아버지를 둔 덕에 vip 혜택이 있었다. 그래서 리프트권도, 숙박도 할인 혜택을 많이 볼 수 있다며 몇 명 데리고 갔고 나도 덕분에 큰 비용 부담 없이 갈 수 있었다. 그때는 그 친구가 마냥 부럽고 상대적 박탈감을 많이 느꼈는데 지금 생각하니 친구도, 그 경험도 내게 큰 복이었다. 내가 학교에 나타나지 않으니 나에게 연락을 여러 차례 했던 것도 그 친구였다.


친구가 보드 스쿨에서 배운 강습 내용을 그대로 적용해 나에게 수업을 해줬다. 그렇게 보드를 배웠다. 몇 시간 후 처음으로 비기너 턴으로 시원하게 슬로프를 내려오면서 행복감을 느꼈던 것이 내 인생에서는 파격적인 순간이었다. 시원한 공기와 하얀 풍경, 눈 위로 보드가 미끄러지는 감촉, 균형을 잡기 위해 내 몸의 감각을 통제하는 희열, 보드가 눈을 가를 때 나는 듣기 좋은 소리. 이 모든 것이 처음 느껴보는 환희로 가득 찬 하나의 새로운 세상이었고 지금도 그 순간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보드 타는 것이 미칠 거 같이 재밌어서 쉬지도 않고 타고, 넘어지는 시간도 아깝고 바인딩하는 시간도 아까워서 서둘렀던 것이 생각난다. 나도 정말 어지간하다. 그리고 둘째 날 친구들이랑 아점으로 먹었던 깐풍기도 정말 맛있었고 완벽한 추억으로 남았다.  


그 해 겨울이 끝나기 전 동아리 MT를 기회로 보드를 한번 더 타러 갔었다. 마찬가지로 너무 재밌었다. 하지만 겨울이 끝났을 땐 나는 복학하지 못하고 방에 있었고, 그 후로 얼추 1년 반 정도의 시간을 방에서 보냈다. 첫 은둔이었다. 그러다 군대를 갔고 군대에서 겨울에 휴가를 나왔을 때 형이랑 아빠에게 스노보드를 타러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미취학아동일 때부터 내가 지출을 발생시키는 상황에서는 늘 죄악감이 들었는데도 용케도 그런 요청을 했을 만큼 보드 타는 것은 정말 인생에서 찾은 보물 같은 콘텐츠였다. 가족 중 딱 1/3을 차지하는 남자끼리 3 부자가 스키장에서 1박을 했다. 내가 배웠던 대로 형에게도 알려줘서 결국 형도 보드를 탈 수 있게 되었다. 형도 재밌어했고, 아빠는 숙소에서 책을 읽으셨다. 자고 다음 날 강원도에서 먹었던 하얀 순두부찌개랑 감자전도 너무 맛있었다. 또 좋은 추억 하나 찾았네.



얼마 전까지 집에만 있던 나를 보는 형과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 또 할머니 엄마, 누나들, 여동생의 마음도.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김혜자 님 내레이션처럼 "후회로만 가득 찬 과거와, 불안하기만 미래가 지금을 망치지 못하게" 지금은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해야겠지. 이번 구정에 집에 가면 아빠에게 사과하기 위해 사과와인을 사간다. 말장난은 아니고 우리 아버지의 추억의 음식에는 사과 와인이 있어서다. 같은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한다고 짜증만 낼 게 아니라 한 번 사드릴 생각을 왜 못했을까. 얼른 집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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