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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뇽이 Feb 06. 2024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행복하다 2

새벽부터 출발해 정신없이 지나가서 그런지 스키장의 시간은 꿈처럼 아련하지만 근육통이 대신 여운처럼 남았다. 나름대로 스키장 가기 전 2주 동안 런지나 스쿼트 같은 하체운동도 하고 코어운동도 하면서 대비를 어느 정도 해서 그런지 근육통의 범위나 정도가 심하진 않다. 유비무환!!


토요일에는 다들 피곤하고 몸이 쑤셨을 텐데도 뒤풀이를 2차까지 했었다. 대화의 내용도 전과는 조금씩 달라지는 듯했다. 긍정적인 부분도 있고 부정적인 부분도 있는 것 같지만 소통은 확실히 의미가 있다. 그리고 약점보다는 강점을 보려고 더 애를 써야겠지.   


사람들과 헤어지고 집에 도착해서 씻고 1시에 기숙사 침대에 누웠는데 눈 떠보니 아침 9시 반, 방 안이 밝았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깨는 감각 없이 한 번에 8시간이나 넘는 시간이 지나가 있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다. 기숙사에서의 5개월 남짓되는 시간 동안 밝은 방에서 깬 건 이번이 두 번째다. 두 번째 늦잠이었다.


이제 진짜 방학이 시작된 거 같아 고삐가 풀렸는지 기숙사 편의점에서 과자를 잔뜩 샀다. 오레오가 2+1이어서 시나몬번, 민트초코, 씬즈 바닐라무스 이렇게 골랐다. 쿠키랑 초콜릿도 여러 개를 더 사서 방에서 커피랑 차랑 과자를 먹었다. 한 번에 저걸 다 먹었다. 4천 칼로리는 족히 됐을 건데 맛있게 먹었다. 그래도 양심이 있어서 저녁에 첫 끼니로 오트밀을 먹고 기숙사 헬스장에서 좀 뛰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한 후 기숙사 퇴사일이 슬슬 다가오고 있어서 짐 정리나 책상 정리를 좀 했다. 작년에 두 달 동안 청년이음센터에서 사업 참여를 하며 받았던 인쇄물들이나 공연 티켓 등을 추억용으로 모아놨던 것들이 제법 있었다. 이번에 그것들을 핸드폰으로 스캔을 해서 저장을 하고 현물은 버리는 작업을 싹 했다.


폐지를 버리러 분리수거장에 갔는데 지난 학기 강의 교재였던 <조직행동론> 18판이 있었다. 안 그래도 더 읽어보고 싶어서 기말고사 끝나고 "조직행동론 도서관에서 빌려서 한 번 읽어볼 것"이라는 메모를 남겨놨었는데 방학 때 근로를 하면서 도서관 운영 시간에 갈 수가 없어 빌릴 수가 없었다. 그랬던 책을 운 좋게도 분리수거장에서 주어 버린 것이다. 폐지 수거하는 분이 현장에 계셨는데 간발의 차였던 것 같아 더 기분이 좋았다. 책은 커버를 깨끗이 닦아서 책장에 모셔놨다. 최근에 내가 자주 언급하는 내용들이 많이 들어있는 아주 배울게 많은 유용한 책이란 말이지.


이번엔 분리수거장에서 나왔더니 주차장에서 기숙사 관리인 아저씨를 다시 마주쳤다. (오전에 편의점에 과자를 사러 갈 때 마주쳤었다.) 오전에 마주쳤을 때는 목례만 하면서 지나쳤다.


'좀 있으면 방 빼는데 소주 한번 하자시더니 연락이 없으시네. 그냥 인사치레였던 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먼저 말씀을 드려볼까.'


라고 생각했던 참이었기 때문에 두 번째 마주쳤을 때는 인사를 드리고 얘기를 꺼냈다. 생각 많이 하지 않고 그냥 하는 게 조금 늘었나 보다. 아니면 전 날 스키장 뒤풀이에서 소주를 감질나게 먹어서 소주에 대한 갈망이 있었나? 모임에서 자주 만나는 청년분들은 주량이 적어서 술 마시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아쉽지만 그래도 시원한 별빛청하는 맛있었지.   


"선생님, 저희 소주는 언제 한번 마실까요? 설도 있고 퇴사일도 얼마 안 남고 해서 여쭤봅니다."

"아, 그래 그럼 오늘 한번 먹을까? 12시에 주차장으로 와."


그렇게 됐다.


스케이트보드를 받고 성함을 여쭤봤다가 이름 대신 전직만 알게 된 아저씨. 약속된 자정에 주차장에서 만나 식당으로 가면서 이것저것 물어봤다. 그래서 그때 못 들었던 이름은 무엇인지, 나한테 스케이트보드를 줬던 이유는 뭐였는지, 서울시 '고립은둔 청년' 지원 키트 스티커가 붙어 있던 상자를 보고 관심을 주신 게 맞는지 등.


선생님은 셰프 생활 34년을 하다 보니 사람 볼 줄 아는 게 있다고 운을 떼셨다. 괜찮은 학생들 중에 내가 날렵한 게 운동을 좋아할 것 같아서 보드를 줬다 하셨다. 상자에 대해서는 말씀을 아끼셨지만 확실히 인지하셨던 걸 알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식은땀이 어쩌고 하면서 스티커 크게 붙여놨다고 센터 원망하는 글을 남겼던 거 같은데 참.


식당은 내가 학교에서 역으로 다닐 때 늘 가던 길에 있었다. 선생님은 "여기가 맛있고 가격도 착하다."며 자주 다니는 식당이라고 하셨다. 또 근처 자주 다니는 다른 집도 몇 집 여쭤보고 네이버 지도에 저장해 놨다.


차림표를 잠깐 보시더니 연어샐러드, 닭볶음탕과 참이슬을 주문하셨다. 음식이 나오기 전 소주를 먼저 까서 마시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생님은 본인이 술을 좋아하고 기숙사 몇몇 학생들과 종종 술을 마시기도 하며 학생들 여럿과 함께 마시기도 한다고 하셨다. 안 그래도 다음 주쯤 모임을 생각하고 계셨다는데 내가 조급해서 먼저 데이트 신청을 했나 보다. 그래도 조만간 있을 다음 회동에 또 낄 생각을 하니 너무 재밌고 좋았다. 나 술 좋아했었지.


"선생님 감사합니다. 드릴 말씀이 하나 있는데요. 저는 방에 있을 때 이런 순간을 늘 상상하고 소망했었거든요. 밖으로 나와서 평범하게 살면서 어른이랑 소주 하면서 내 과거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순간이요."


관리인 아저씨든 호텔 34년 근속의 전직 셰프든 선생님이든 아니면 어쩌든 나든, 이 인생 선배님은 행복한 표정으로 웃으셨다.


음식이 나오고는 안주를 먹으면서 술도 제법 마시면서 대화를 나눴다. 건강하게 세상 사는 방법을 말씀해 주셨고 서로의 이야기들도 했다. 둘 다섯의 '일기' 라는 노래도 알게 됐다. 세상 사는 법은 근 반 년동안 내가 세상 속으로 나와서 열심히 배웠던 것들과 일맥상통하는 말이었다. 정답이기 때문이겠지. 또 한 번 절감을 하면서 마음에 새겼다. 마지막 병을 비웠을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좋은 시간이었고 따뜻했고 행복했다. 악한 것들이 일부 있지만 다 그렇지 않다는 말씀도, 꿈이 실현된 것도 행복했다. 술기운도 있고.


이렇게 하나하나씩 하고 싶었던 것들에 줄을 그을 때마다 나는 행복하다. 행복해진 히키코모리, 그게 나네.

어느 순간 미래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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