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送年)

by 온호

12월 초부터 한 해를 정리하는 의식을 이곳저곳에서 꾸준히 치러 왔지만, 어제 기술교육원에서의 헤어짐 인사에서는 한해 끝이 가까이 다가왔다 보니 유독 송년의 느낌이 강하게 났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일주일 간의 방학이 찾아왔다. 그동안 제법 애썼다.


푹 자고 일어난 오늘 오전엔 본가에 내려가기 전에 필요한 방 정비를 했다. 쓰레기를 버리고 세탁기를 돌리고 청소를 하고 식물에 물을 줬다. 개업 준비로 바쁜 셋째 누나 대신 내가 조카들과 함께 KTX로 이동하기로 해서 점심쯤에 누나가 조카들을 데리고 내 방으로 왔다. 원래는 지하철역에서 기차 시간에 맞춰 만나기로 했었는데 누나가 어쩐지 좀 더 일찍 조카들을 보내고 싶어 하는 분위기를 풍겨서 아예 일찍 와서 점심 먹고 이동하는 쪽으로 눈치껏 바꿔 제안했다.


도착 시간에 맞춰 식사를 픽업하고 누나의 주차를 도운 다음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조카 둘에게는 25일에 만들어둔 레몬청으로 레모네이드를, 누나에게는 레몬차를 음료로 제공하고 같이 식사를 했다. 레모네이드도 맛있고 음식도 맛있어서 모두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쳤다. 선물 받은 레몬 사탕도 후식처럼 하나씩 먹었다.


음식을 포장해 온 식당도 코앞이겠다 식사를 매장에서 하고 출발하는 게 쓰레기도 안 나오고 설거지도 안 나오고 나한테는 편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저번 가족 모임에서 유일하게 내 방에 들렀다 가지 않은 셋째누나네기 때문에 방에서 먹기로 결정 내렸다. 가치관에 따라 '첫 방문 손님에 대한 마땅한 대우'일 수도 '그런 게 무슨 상관'일 수도 있지만 낭만이라든지 정성이라든지 하는 건 효율보다는 비효율과 동행한다는 평소 생각을 따라 그렇게 했다.


늘 효율을 추구하며 '그런 거'에 질색하는 셋째 누나지만 세상사 대접 못 받아서 서운해지는 경우는 있어도 받아서 싫을 건 없는 법이다. 누나는 좁긴 하지만 깨끗하게 정돈된 쾌적한 공간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내가 내려가있는 동안 서울에서 볼 일 볼 때 하루 정도 써도 되겠냐고 물었다. 내가 살고 있는 조그만 원룸의 특장점인 '난방'의 위력도 한몫한 것 같다.


누나를 내 방에 남겨두고 조카들 옷가지가 든 캐리어를 받아서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으로 이동했다. 다시 기차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해 뽑은 지 이틀 된 차로 갈아탔다. 큰 누나가 자신의 첫 차 조수석에 아빠를 태우고 기차역으로 마중 온 것이다. 예상하고 있던 아빠차가 아니고 처음 보는 차여서 경적을 울리고 나서야 타야 된다는 걸 알았다. 중간에 엄마 심부름으로 들른 마트에서 주차를 하고 장을 보고 다시 빠져나갈 때 조금 답답했던 것을 빼면 운전도 무리 없이 잘했다. 누나는 아버지도 이제 나이가 70 중반이다 보니 부모님 모시고 다닐 때 본인이 운전을 하기 위해 인생 처음으로 차를 샀다. 막걸리를 뿌리거나 고사를 지내거나 하지는 않지만 안전하게 잘 타고 다니기를.


집에 도착해서는 누나가 사다 준 레몬파운드부터 먹었다. 내가 너무 맛있게 먹었던 거였다. 처음 먹었을 때 같은 짜릿함은 없었지만 그래도 역시 맛있었다. 그리고 내년에 6학년이 되는 첫 조카가 자기도 레몬청을 만들어보고 싶다 해서 사 온 레몬으로 레몬청도 만들었다.


엄마가 정성껏 준비한 식사를 아빠가 만든 사과 와인이랑 같이 먹었다. 아빠 솜씨가 점점 느는 것인지 와인이 제법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고는 내가 들고 온 만든 지 이틀 된 레몬청으로 부모님은 레몬차를 한잔씩 마셨다. 며칠 더 뒀다 먹는 게 좋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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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나머지 것들보다 한참 늦게 마지막 한 과목의 성적이 나옴으로써 최종 성적이 확정됐다. 내 대학생활의 마지막 성적표이기 때문에 인스타그램에 스토리로 올린다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대면으로 말하거나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반응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반응과 그 반응에 대한 나의 반응, 그리고 다시 나의 반응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모두 원치 않는다. 그래서 반응을 만들어 낼 액션 자체를 하지 않기로 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 생긴 성적 부여 비율의 변화와 수강생의 상당 비율을 차지하는 중국인 유학생의 존재는 분명 성적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는 눈먼 칭찬이나 축하보다는 그런 사정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과 이 부분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다만 2년 동안 꾸준히 독서를 하고 비루하든 말든 어쨌건 글쓰기도 꾸준히 했던 것이 시험을 치르는 데 도움이 된 것이라면 아낌없이 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31일에는 서울로 돌아가 자조모임 청년들 몇 분과 저녁을 먹고 새해 일출을 보러 갈 계획이다. 오늘은 거기에 필요한 것들 몇 가지를 미리 샀다. 송구영신하는 세리머니를 올해만큼 많이 하기도 처음인 것 같다. 말 그대로 송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