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게 만들어준 거름들
천천히 세어보니 내 히키코모리 경력은 10년이 조금 넘었더라. 근데 내 입장에서 나가게 되는 계기와 과정은 체감상 한 두 달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것 마냥 순식간이었다. 엄마한테는 오히려 나보다 더 긴 준비 기간이 있었던 건 조금 나중에 깨달았다.
중간중간 여러 사건들이 많이 있었지만 내 생활에 큰 변화는 없던 세월은 8,9년 되지 않나 싶다. 그중에 나중에라도 내 정신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며 내가 지금 다시 학교를 다니게 만들어 준 거름들이 있다. 그중에 몇 이야기해 보자면 할머니가 100세를 끝으로 소천하신 일과 내 모든 평생으로 볼 수 있는 20년 넘게 산 집에서 이사를 가게 된 일, 그리고 조카의 돌잔치를 기다리며 운동을 시작했던 일 등이 있다.
첫 번째로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와 그 후의 이야기. 할머니는 굉장히 성격이 쾌활하시고 유머감각이 있으신 분이셨다. 할머니가 주신 어릴 때의 추억들이 참 많다. 그런 할머니는 내가 15살일 때 의자에서 떨어져 넘어지면서 병원 와상생활을 하시다가 치매를 얻고 그 후로 15년 동안 집에서 생활하시다가 돌아가셨다. 15년 동안의 간병은 물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책임감까지 해서 9할, 어쩌면 그 이상 엄마가 혼자 한 거 같다. 엄마도 당신의 50대부터 시작해 70이 다 되도록 할머니를 돌보았다. 나는 자잘한 소일거리나 힘이 필요한 일을 가끔 거들었다. 그런 주제에 나도 10년 정도는 치매노인과 지냈으니 세상에 웬만한 치매 환자 관련 에피소드는 모두 겪어 봤다는 부심이 들 때면 참 같잖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히키코모리가 되기 전 아직 중학생일 때 할머니를 업고 5층을 걸어서 내려가고 올라가고 할 때는 내가 효자가 된 거 같았다. 히키코모리가 된 후 게임만 하고 지내면서 분노에 사로 잡혀 있을 때는 할머니한테 못 보일 꼴도 많이 보이고 죄도 지었다. 할머니의 마지막 1,2년 때는 '산 사람의 목숨을 장작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목숨에 불을 때는 게 맞나' 생각하면서 답답하고 짜증이 나는 감정을 자주 느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나는 아빠가 본인의 효도를 엄마를 통해 착취한다고 생각도 많이 했다. 아빠를 혐오했다. 그런 아빠가 가끔 할머니가 돌아가실 거 같다고 나를 할머니 침대 곁으로 불렀지만 그럴 때에도 나는 아빠의 호들갑이라고 생각해 불쾌감을 느끼곤 했다.
할머니의 마지막 날도 나는 어두운 새벽부터 별로 하고 싶지도 않으면서 도피를 위해 의무이자 습관처럼 게임을 하고 있었고 오전쯤에 아빠가 나를 불렀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거 같다.' 게임을 방해받아 짜증이 난 나는 잠깐 거실의 침대로 가 숨을 색색 쉬고 계시는 할머니를 확인하고서는 다시 컴퓨터 앞으로 돌아가 게임을 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아빠가 격앙된 느낌으로 엄마와 나를 불렀고 엄마가 급하게 와서 붙었다. 아빠의 황급한 느낌 조금과 불안하고 무서운 느낌 조금, 누가 와서 본인의 판단이 맞는지 틀린 지 확인 좀 해달라는 거 같은 절박한 느낌 조금, 뭔가 큰 마음을 먹은 거 같은 느낌 조금씩이 섞인 복잡한 목소리와 그 약간의 소란에서 나도 뭔가 느끼고 얼른 나왔다.
할머니는 너무 약한 숨을 쉬고 계셨다. 밖으로부터 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코나 입에 이미 들어있는 것 같은 아주 조그마한 숨이나 빨아들여보려는 미약한 숨. 얼마 전부터 문자 그대로 피골이 상접, 자꾸만 사람보다는 해골의 형태로 보이던 육신이었고 군데군데 욕창 속 속살과 시퍼런 핏줄이 다 드러나있던 육체였다. 이제 그 육신에는 숨 쉴 힘도 남지 않았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내 할머니의 숨은 완전히 멎으셨고 우리는 할머니가 들을 수 있게 기도를 하고 할머니가 좋아하는 찬송을 불렀다. 슬프고, 홀가분했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내가 할머니한테 잘못했던 일들과 더 잘하지 못했던 일들에 대한 후회가 많았다. 하지만 '돌아가면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같은 생각이 들어도 마음을 고쳤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내 괴로움이 사라져서 드는 기만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머릿속으로 '있으면 괴롭지만 없으면 외롭다.', '있는 것은 ㄱ-기억, 추억이다.' 같은 말장난을 만들면서 괴로움이 없으면 외롭고 괴로움의 기역도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된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전에는 개좆 같은 소리라고 생각했던 말들, '지금이 괴로워서 죽고 싶은데 어떻게 그 딴 느긋한 말이나 하냐.'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말들이 다 맞는 말이구나, 지금의 괴로움을 동시에 나를 외롭지 않게 해주는 추억으로 맞으며 살아야 한다는 걸 스스로 깨닫고 그런 말들을 납득할 수 있게 됐다.
내가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슬펐지만 홀가분함도 느낄 수 있었던 이유, 장례를 치르던 시기에 그나마 조금이라도 저런 건강하고 건설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나는 할머니한테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용서를 받았다. 집에 엄마도 아빠도 없어서 타이밍도 좋았고, 할머니 밥도 떠먹이고 큰일 뒤처리도 하다 보면 자연스레 할머니 침대 곁 간병 스툴에 앉아 쉬게 된다. 지금 떠올리니 그날도 날이 좋았다. 햇빛이 있어 밝았고, 조용한 오후였다. 할머니는 언제 가실지 몰랐고 언제 가도 이상하지 않은 날들 중이었다. 할머니도 스스로 그런 당신의 인생에 지쳤고 미안해했고 서글퍼했다. 침대 위에 누워있는 그런 한 여인의 얼굴을 보며 가만 앉아 있던 나는 용기를 낼까 말까 망설였다. 굳이? 오글거리는데, 이별을 준비하는 인간의 너무 전형적인 모습인데. 같은 생각이 들며 내 입을 막았다.
"할머니 그때 때려서 미안해요."
용기를 내서 겨우겨우 할머니 하고 부른 후 입을 열어 말했다. 할머니는 누워서 내가 무슨 할 얘기가 있는 걸 보시고 내 쪽으로 고개만 돌려 가만히 들어주셨다. 이미 많이 흐릿해진 눈이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깊은 눈으로. 그리고 고개를 살짝 아주 살짝 끄덕여주셨다. 할머니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 눈빛에서 괜찮다고 하는 음성이 들렸고, 나를 보듬어주는 큰 사람의 품이 내 몸과 마음으로 그냥 와서 닿았다. 이 모두가 10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작은 구원이 되어주었다.
컴퓨터가 할머니 방(큰 방)에 있었기 때문에 밤낮이 바뀐 나는 밤을 할머니랑 같은 방에서 보냈다. 어느 날 밤중인지 꼭두새벽인지에 할머니가 주무시지 않고 헛소리를 하면서 자꾸만 나가려고 하셨다. 그런 섬망증은 매일같이 있는 일이었는데도 그날은 동생도 집에 와서 있었던 게 내 마음에 어떤 영향을 준 건지, 할머니 고집이 유독 세서 그랬던 건지 나는 화가 많이 났다. 걸레 자루로 할머니를 때렸다. 사실 툭툭 건드리듯 때리는 시늉만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내가 그렇게 내 인생의 화를 할머니한테 최악의 방식으로 표출한 것이 비참하고 죄송했다. 할머니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억을 많이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