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 강의 가기 전
첫 히키코모리 생활은 1년 반 정도였다. 20살 크리스마스를 지나고 집에 내려와서 대학에서 쓸 돈을 좀 벌려했었다. 근데 크리스마스 때 나한테 무슨 일이 있긴 했는데 그게 영향이 있었는지 방학 때 의욕 없이 게임만 하다가 방학이 다 지나 돈을 벌어 놓지 않아 복학하기가 싫었다. 학자금 대출은 어쩔 수 없더라도 생활비 대출한 돈으로 밥 먹고 교통비 내고 옷 사고 다 해야 되는 게 미칠 거 같이 스트레스여서 여윳돈이 조금 필요했다. 근데 그 돈이 없다 생각하니 그냥 학교를 안 가고 싶어진 것이다. 이게 내 첫 번째 도망이었다.
돈에 관련된 내 가정환경이나 성장 배경 이야기도 나중에 한번 자세하게 얘기하고 싶다. 할 얘기가 많다. 겨울 방학 때 왜 무기력하고 의욕이 없어서 게임만 한 거다라고 생각하냐면 여름 방학 때는 내가 대학생들이 며칠하고 곧잘 도망가는 그런 힘든 일을 나름 보람차게 재밌게 해서 돈을 좀 벌었던 게 기억난다. 분명 크리스마스 때 내 마음에 약간의 고장을 일으킨 모종의 사건이 있긴 한데 도저히 지금 얘기할 용기는 안 난다. 크리스마스라고 하니 어느 정도 예상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오픈된 곳에 적나라하게 적었다가 가족들을 비롯해서 사람들이 볼까 봐, 심지어는 당사자 들이라든지가 볼까 봐 걱정돼서 안 되겠다. 그리고 내가 어제 여기서 처음 올린 글도 아무도 안 볼 거라고 속으로 세뇌하고 실제로 그럴 거 같기도 해서 발행하기 눌렀는데 채 몇 분이 안 돼서 라이킷이 달렸다고 알림이 오는 걸 보고 식겁했다. 어디서 찾아서 보는 거예요. 이런 걸 봐도 기분이 안 잡치시는 건가요.
그 첫 1년 반 히키코모리 생활도 매일 눈 뜰 때부터 자려고 누울 때까지 죽고 싶다는 생각에만 강하게 압도되어 다른 생각은 할 수 없는 상태였고 그 후에도 다른 생각을 가끔 하더라도 죽고 싶다는 생각은 거의 10년 동안의 매일에 함께였다. 지금 떠올려 보려 하면 오래돼서 그런지 언제부터 언제까지 가장 심했고 또 언제부터 최악에서 조금 나아졌었는지 못 나누겠다. 기억을 집어서 건져내보려고 해도 온통 흙탕물처럼 뿌연 느낌이라 뭐가 잡히지가 않는다.
대충 생각나는 계기는 처음엔 그냥 학교를 안 가고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게임만 하면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돈을 쓰지 않아도 되고 옷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반사만 되는 것이라면 무엇에든지 내 얼굴을 자꾸만 비추어 보면서 여드름을 확인하면서 절망감이 들거나 짜증이 나거나 하지 않아도 되고. 그렇게 고통을 피해 방구석으로 숨어 비교할 타인 없이 혼자 시간을 보내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를 위한 무슨 좋은 말을 듣거나 보아도 심드렁했고 속으로는 '나를 살리려고 해도 소용없어.' 나 '동기부여 하려고 하지 마.' 같은 생각을 했다. 어차피 난 죽을 거니까. 그래서 콜라를 먹고 찝찝해도 일부러 더 양치를 안 했고 자러 갈 때까지 하루종일 양치를 안 하고도 또 같은 말을 되뇌었다. 곧 죽을 사람이 충치가 있어도 무슨 문제겠는가. 건강하면 자살을 했다가 혹시라도 살아남을까 봐 평소에 하던 농구도 그만뒀다. 그러면서 서서히 완전하게 작고 사소한 것들이라도 긍정적인 선택은 아예 하지 못하는 내가 됐다.
그렇다고 죽고 싶은데 적극적으로 죽을 방법을 찾고 시도하지는 않았고 언젠가, 혹은 서른 살쯤 동네 뒷산에서 떨어져 죽어야지 하면서 막연하게 미루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그것조차 미뤘다. 한 번은 예비군 소집일에 너무 가기가 싫어서 컴퓨터 정리해 놓고 동생한테 비밀번호 알려주고 산으로 가다가 돌아와서 그냥 훈련받으러 동사무소로 간 적은 있긴 하다. 편안하게 죽고 싶은 욕심은 또 남겨놨나 보다.
그리고 하루종일 우울이 짓누르는 아래에 깔려 있기가 너무 괴롭기 때문에 새벽이나 밤중에라도 눈이 떠지면 컴퓨터를 켜서 게임을 하거나 그것마저 지겹거나 귀찮으면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는 생활을 했다. 게임 안에 일회성 목표에 몰두하는 동안만큼은 그나마 죽고 싶은 생각이 잘 안 들기 때문이었다. 가장 값싸고 간단한 회피의 수단이 게임이었고 게임이 끝나기만 해도 바로 안 좋은 기분이 또 들기 때문에 만성적으로, 중독적으로 게임을 했다. 그렇게 1년 반을 보내고 군대를 갔다.
군대를 가야 된다는 과제 압박은 1학년때부터도 있었다. 방학 때 고등학교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술을 마시며 친구들 중 누구는 어디에 입대를 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을 때도 생겼고, 대학 생활을 하면서 복학생 선배들을 볼 때나 친구들과 너는 언제 갈 거냐고 계획 얘기를 나눌 때도 생겼다. 히키코모리 생활을 하던 중에 입영통지서도 받았고 아빠도 입대해야 되지 않냐는 얘기를 가끔은 하셨었다. 그때는 자포자기니까 그냥 딴생각하면서 머릿속에서 지우고 미루려고 했다.
그러다가 가족들이랑 밖에서 식사를 해야 했던 일이 있었다. 그때는 밖이라곤 아예 편의점도 안 나갈 때라 나갈 준비할 때 엄마가 사 준 옷을 입고 씻고 면도하고 준비하면서도 내 모습이 너무 못나보여서 싫었던 기억이 난다. 그땐 늘 그랬다. 거울 앞이 무서웠다. 내가 너무 못 생겨 보이고 못났고 성인인 주제에 엄마가 사놓은 옷이 아니면 입을 옷이 없는 전형적인 히키코모리의 내 모습에 비참했다.
다른 날들은 뿌옇고 어둡고 흐릿한데 그날 식사를 하고 돌아오던 차 안의 모습은 지금도 선명하다.
햇살이 밝은 좋은 날이었고 그래서 창 밖을 보는데 나무가 푸르고 세상도 따뜻했다. 창문을 열어 바람도 맞았었나. 가만히 그 햇빛이나 풍경을 보고 있으니 그것들이 포근하게 내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보니 입대 문제가 계속 머릿속에 들어있는데도 처리를 안 하고 미루고 미루는 게 지겹게 느껴졌다. 집에 가서 입대 신청이나 해야겠다고 그때 갑작스레 결심하게 됐다.
군대는 강원도 화천으로 잘 갔다 왔고 그 안에서 여러 가지 시련이나 자살 충동을 느낄 때도 많았지만 열심히 일기도 쓰고 규칙적으로 생활하며 지냈다. 심지어 훈련병 때부터 훈련소에 입소한 250명 중에 훈련을 12등으로 수료해서 수료식날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자랑스럽게 포상도 받기도 했었고 군생활 중에도 포상을 몇 개 따기도 했었다. 개과천선하나 싶었다. 근데 나는 2014년 제대 후 3월에 2학년 1학기 복학을 했다가 2014년 여름 방학부터 2023년 2학년 2학기로 재입학을 하기 전까지 다시 히키코모리가 된다. 실은 지금도 이렇게 다시 학교를 다니다가 학기가 끝나고 또 히키코모리가 될 수도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을 안 하는 건 아니다. 그렇게 되지 않게 이번엔 정말로 성장해야 한다. 14년도 복학했을 때의 대학 생활에서 느낀 점이나 다시 학교를 가기 싫어진 일들도 나중에 다시 자세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될지 모르겠다. 평점은 이때가 제일 높았다.
두 번째 히키코모리 인생 초반 몇 년 동안은 1년마다 가는 예비군 훈련이 유일한 외출이었던 것 같다. 이 시기에도 샤워는 내 악취가 맡아지거나 떡 진 머리카락을 스스로도 만지기가 싫어지는 일주일 정도까지는 기본으로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예비군 훈련 통지를 받으면 뒤통수를 맞는 것 같은 당혹감과 히키코모리인 나를 자각하고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 든다. 훈련일 몇 주 전부터 신경이 쓰여 심장이 쇄골 정도에 올라와있는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이 들고 잠도 더 자주 깬다. 예비군 특성상 동네 친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이 걱정돼서이기도 하고 내 또래에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거나 그들끼리 나누는 평범한 일상 얘기를 듣는 게 다 내 양심을 괴롭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장 큰 건 어릴 때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인기가 꽤나 있었던 내가 이렇게 역변해 버린 걸 혹시 누구한테 들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었다. 훈련 통지서를 보면 자꾸 의식이 그리로 가니 잘 보이지 않는 데로 치워놓고 역시나 다시 컴퓨터 게임이나 하면서 당일까지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