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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뇽이 Mar 14. 2024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소소한 대학 생활 단상

창가의 놓인 줄무늬아이비와 홍콩야자가 요즘 물을 벌컥벌컥 잘 마시는 것 같다. 화분 물통에 든 물이 금세 줄어드는 것을 보면은 왜인지 퍽 흐뭇하고 안심이 된다. 얼마 전 초등학교에 입학한 동생을 가리키며 "쟤가 요즘 키 크는 시기라 많이 먹어요."라고 말하던 4학년 짜리 조카애의 말이 생각난다.


'너희도 키 크는 시기니?'


하기사 봄이긴 하구나.

봄이 오고 개강도 했는데 나도 그동안 밀린 생장을 좀 해볼 수 있으려나.


시간표를 보며.

이번 학기는 팀플도 많고 연강도 많아서 불안, 걱정의 감정이 있었는데 '베테랑 대학생'인 룸메가(대학교 네 군데 이상 다니고 올해 교대를 졸업하고 동시에 신입생으로 다시 우리 학교를 다니는)


"안 죽어요~."


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맥이 탁 풀리면서 '그래, 안 죽는구나. 겁먹을 필요 없구나' 싶었다. 뭔 걱정이 그렇게 많았냐 너는 또.


그저께는 같이 조를 짰던 여학생들이 아무래도 자신들의 성급한 결정이 켕겼던 것인지 조를 확정 짓지 않고 어물쩍 발을 빼는 일이 있었다. 처음에 "같이 하실래요?" 했더니 뭐 때문인지 얼굴이 목부터 귀까지 삽시간에 시뻘게져서 건강이 걱정됐던 여학생은 강의가 끝나자마자 일어나서 내빼버렸고, 그 옆자리 여학생은 통화를 하면서 대화를 피했다. 나는 이 일로 적잖이 당황을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는데, 왜냐면 작년에는 무난히 조를 잘 짰었기 때문이다. 조를 짜기로 했던 여자애들이 일단 엉겁결에 "네, 그래요." 하고 대답은 했지만 내가 너무 아저씨라서 겁먹고 뒤늦게 피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만 의기소침해져버리고 말았다.


오늘 다시 그 수업에서 나머지 남자 조원과 둘이서 5명 조를 완성을 시켰다.

"그 여자애들은 안 할거 같더라고요."

태연하게 말하는 남학생의 모습에서 내 잘못이 아닌 거 같이 느껴졌다.


새삼 작년에 팀플을 같이 했던 학생들과 유치원에서 만난 근로학생들은 정말 친절하고 성숙하고 또 신사적인 사람들이었다. 교수님들도 마찬가지셨고. 정말 큰 복이었구나. 내가 이 선한 인연들을 삶이 주는 복귀유저 보상 같다고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비교대상이 생긴 지금에서 다시 보니 정말 뼈저리게 느껴진다.


재입학한 작년 2학기는 나에게 미움받을 용기의 1권이었다면(희망차고 선한 이상적인 느낌?), 이번 24-1학기는 아들러의 가르침을 실천하다 현실에 깨지고 분노로 돌아온 청년이 나오는 2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저번 학기는 온통 온화한 만남으로 가득 찼지만 이번 학기는 냉혹한 현실에 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교수님이 내 학번, 나이를 보고 무언가 물어보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든지, 나이 때문에 학교 행사 혜택을 못 받는다든지. 되돌릴 수 없는 것에 대해 페널티를 받고 있다. 언제까지고 온실 속에 있을 수도 없고 마땅히 받아야 할 손해인 것을 알지만 속상한 걸 어떡하나. 내 잘못이 아니라 과거의 나의 잘못이라고요!ㅋㅋ에라이.


자기는 호기심이 많다고, 나에게 왜 대학생이냐고 물었던 교수님은 물론 악의가 없었다. '섬세해줄래요' 글에서도 다룬 이야기지만 또 이야기하는 이유는 요 며칠 <파우스트>를 읽으면서 아주 맘에 쏙 드는 문장을 만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감추고 있는 것을 보고 싶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호의와 자유의사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는데요 교수님. 마음속으로 이 대사를 읊으려고 ctrl-f 도 안 되는 종이책을 얼마나 뒤졌다구요.

   

다행히 이번 학기에 우연히 주워 넣은 <불교와 정신분석학> 강의가 이런 여러 불편한 상황들 속에서 멘탈 관리에 도움을 꽤 주고 있다. 아니, 꽤가 아니라 오리엔테이션으로부터 아직 몇 번 듣지도 않았지만 사실 지금 거의 나의 정신적 지주가 됐다. 불교에 이렇게 좋은 가르침이 많았다니. 구독 중인 작가님의 이야기에도 강의 내용과 똑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볼 때는 대학교 강의 안 듣고 브런치에서 훌륭만 작가분들 글만 잘 읽어도 되겠다 싶어서 살짝 흔들렸다. '너 그거 아니야, 그래도 일단 졸업 한 번 해보자. 또 대학교 악몽꾸지 말고'


1. 감각으로 인해 괴롭다. 시각으로 캠퍼스에서 수많은 커플들을 보기 때문에 내가 연애하고 싶어서 괴롭다.

2.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는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

3. '무상'하다는 것      

열심히 내 생활에 적용 중인 내용들이다. 팀플이든 시험이든 이번 한 학기든 뭐가 됐든 결국 지나갈 것이다. 즐기며 최선을 다하자. 할 수 있다. 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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