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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뇽이 Mar 17. 2024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소소한 대학 생활 단상 2

 모닝 루틴.

 조금 예민한 인간의 삶은 때로는 불편할 때도 있지만 알람이 필요 없다는 소소한 장점도 있는 것 같다. 생각하면 일어나지니까. 여덟 살 때부터 그랬다. 요즘은 이런 내 몸 덕분에 편하고 좋다.


 6시~6시 20분 사이에 눈을 뜬다. 침대 위에서 그대로 맥킨지 스트레칭을 10분에서 15분 정도 한다. 일어나기 싫은 김에 침대에 붙어서 밍기적 거릴 겸 허리를 풀어주는 것이다. 그래도 스트레칭같이 귀찮은 루틴도 반년 가까이 되니 습관성으로 변했다. [의무감]-[귀찮음]-[실행] 의 3단계에서 저항이 줄어들면서 정신적 에너지의 연비가 좋아진 느낌이다.


 허리를 충분히 풀어주고 기상 후 기숙사 지하 헬스장으로 간다. 재활 차원의 근력 운동을 가볍게 하거나 러닝머신을 보통은 40분 뛴다. 그리고 지상으로 올라와서 기숙사 정문으로 나와 캠퍼스 산책을 30분 정도하고 그대로 8시에 맞춰 학생식당으로 간다. 대학생 한정으로 조식만 천 원에 제공하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는 나로서는 배도 채우고 식비도 절약하고 큰 도움을 받고 있다. 요즘 물가에 식사를 천 원에 할 수 있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이 글의 커버 이미지인 진달래를 학생 식당 가는 길에서 찍었다. 얼마 전 아무 색도 없던 칙칙한 자리에 못 보던 보라색 예쁜 빛깔 점들이 어느 순간 찍혀있길래 봤더니 진달래 꽃봉오리가 오므라져 있었다. 꽃이 피면 사진을 찍으려고 며칠은 그냥 기다리며 지나쳤는데 생각보다 몇 날 안 걸려서 일찍 꽃봉오리가 열리고 꽃잎이 펼쳐졌다. 이 길에는 가을에는 구절초가 피어서 복잡한 내 마음에 잔잔한 향기를 불어넣어 줬었는데 봄에는 진달래가 피어주니 좋다.


 재밌는 점도 하나 있다. 작년에는 2학기만 다녀봐서 몰랐는데 올해 1학기를 다녀보니 헬스장도 그렇고 학생식당 조식도 그렇고 분위기가 좀 많이 다르다. 1학기가 두 장소의 인구밀도가 훨씬 높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1학기의 학생들이 훨씬 부지런한 것이다. 젊은 대학생들의 열정과 성실함이 변치 않길 바라야 마땅하지만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다. 헬스장 기구 사용이나 조식에 대기가 많이 늘어난 것이 반갑지는 않다.    

밥이 잘 나온다




 유치원에서.

 오전 공강인 날에는 9시부터 유치원으로 출근을 한다. 오후에는 4시 반부터 6시까지 하고 있다. 적당히 일을 하니까 생활에 빈칸이 좀 줄어서 마음이 덜 복잡해져서 좋다. 애들 아빠뻘 나이에 대학생 신분으로 유치원에서 근로장학을 하는 게 어떻게 보면 비참할 만한 문제기도한데 난 잘 모르겠다. 그냥 평범한 대학생들 하고 사는 것 같이 사는 거 같아서 좋고 내 개인 성향이 근로지 특성과 잘 맞아서 좋다.

 


 기숙사 방 안에서.

 낮잠을 선택하기에 딱 좋은 순간이 있다. 햇살이 방 안을 따뜻한 색으로 물들이고 이불에서도 온화한 기운과 좋은 냄새가 풍겨 올라오는 오후. 근데 나는 이럴 때 이상하게 손빨래가 더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책상 위 미니 건조대에다가 빨래한 속옷이나 티셔츠를 걸어 놓으면 향긋한 냄새가 나서 오랫동안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 디퓨저도 쓰고  향수도 뿌리지만 빨래 냄새는 냄새 뿐 아니라 약간 촉촉한 냉기까지 더해지는 게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인 것 같다. 세탁기, 건조기 다 쓰면서도 한 번씩은 이런 것도 좋다.

 


 Maudie.

 지난주 일요일은 남산도서관에서 <내 사랑>을 틀어줬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보니 원제가 주인공의 애칭인 maudie였던 것도 좋았다.  <빨간 머리 앤>도 그렇고 <내 사랑>도 그렇고 도서관에서 참 좋은 영화들로 편성하는 것 같다. 삶을 담은 영화. 그리고 따뜻한 가치들을 느끼고 생각하게 해주는. "너만 유일하게 행복을 찾았구나.", "내가 왜 당신을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같은 대사가 기억에 남아 있는데, 뭔가 더 나에게 공감을 준 부분이 있었나 보다. 에단 호크 연기도 특히 인상 깊었고, 내일은 계춘할망 차례인데 기대하게 된다.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나, 미래의 나에게 전달해 주기 위한 기록들이 머릿속에 너무 높이 쌓여서 무너져 섞여버리기 전에 부지런히 써서 줄이려고 애를 쓰긴 하는데도 쉽지가 않다. 써도 날마다 또다시 계속 생긴다. 좋은 건가 나쁜 건가는 고민하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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