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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뇽이 Mar 17. 2024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소소한 대학 생활 단상 3

 커버 이미지는 기숙사 방 안에서 보는 하늘이다. 저런 하늘색은 볼 때마다 배스킨라빈스의 레인보우샤베트가 떠오른다. 맛있어 보인다. 엄청 허기지지 않을 때라도 풍경이 음식처럼 보이는 건 내 식탐 때문일까? 이유가 뭐가 됐건 사진에는 내가 육안으로 본 빛의 스펙트럼이 잘 담기지 않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이번 학기는 참여형 강의를 많이 듣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학기 말에 조원들과 뮤지컬 공연을 해야 하는 <가창실기> 수업과, 팀 성과 창출을 위해 조원들과의 긴밀한 협력을 요구하는 <리더십 개발> 과목은 난이도가 높다. 두 강의가 모두 강의계획서에서 "적당히 출석만 하고 공부만 해서는 좋은 성적 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는 점도 대단하다. 둘 다 학생 사이의 커뮤니케이션과 수업 참여의 극을 추구하는 강의인 셈이다. 불과 작년까지 장기간 히키코모리였던 나에게는 큰 도전인 셈인데,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된다. 사실 가창 수업은 1주 차에서 오리엔테이션을 들은 30명 가까이 되는 학생들 중에 2주 차에 남은 학생은 몇 명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전부 수강 철회를 한 것이다. 그 남은 소수파의 한 사람으로서 '괜히 욕심내나?' 싶은 마음도 들었었다.    


 가창 수업 시간에 간단한 자기소개를 했다. 교수님은 과와 학번을 말하고 자신의 특이사항을 이야기하는 것을 고정된 형식으로 발표하라고 정해줬다. 앞에서 10학번이라고 소개했기 때문에 나는 특이사항 파트에서는 내가 히키코모리였다고 소개했다. 10학번이 지금 학교를 다닐 만한 여러 사정 중 하나의 경우의 수를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두 번째 특이사항으로 아침마다 학교를 산책한다고도 말했다. 재밌었던 건 내가 히키코모리였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숙연한 것도 아니고 반응이 딱히 없는 분위기였는데(조심해 준 거겠지!) 이어서 아침에 캠퍼스 산책을 한다고 하니 몇 군데서 탄성이 나왔다. 아침 산책이 히키코모리보다 충격인 거니..?  


 물론 나는 서른 명의 낯선 20대 대학생들을 다 믿지는 않는다. 교수님도 포함해서. 그래도 나의 민감한 이야기를 초면에 했다. 나에 대한 편견도 생길 수 있고, 그들이 속으로 나를 무시하거나 조롱할 수도 있다는 것도 안다. 근데 그것들보다도 사람들은 어차피 나를 신경도 안 쓸 거라는 걸 더 믿기 때문에 이야기했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연기를 하다 보면 결국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게 된다는 교수님의 말에 초장에 그냥 오픈했다. 


 스스로 몰아붙이는 걸 좋아하는 성향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나서서 하게 되는 것일까? 오르막길에서 일부러 더 뛰는 습관처럼. '받아들여야 해, 드러내야 해.' 하는 압박을 스스로에게 주고 있는 것인지를 자기소개 후 자리로 돌아와서 생각해 봤다. 하지만 내 자기소개 차례를 기다리던 순간에 상상한 내 모습은 저런 대사를 하는 나였다. 자연스럽게 스스로의 마음을 따라 그렇게 했다고 생각한다. 이게 지혜로웠니, 저게 어리석었니는 따지고 싶지 않다.


아, 그리고 확실히 남들 앞에서 노래하고 공연 만들고 하는 강의라 그런지 수강 신청한 학생들이 전체적으로 굉장히 외향적이다. 그래서 자기소개를 듣는 일이 꽤 즐거웠고, 그런 환경에 있다 보면 에너지도 얻어가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보고 있다. 

      



 리더십 개발 강의도 특이하다. 교수님을 교수님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제리"라고 불러야 한다. 출석을 부를 때 이미 한 번씩 모두가 "네, 제리."라고 대답하는 연습 과정을 거쳤다. 제리는 겸임교수고 현직 CEO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론적인 것도 물론이지만 굉장히 실무 환경에 밀접한 체험을 학생들에게 주고 싶어 하고, 전형적인 성공한 사업가 특유의 '열정과 성실함으로 공간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풍긴다. 또 한국인은 14명인데 유학생이 43명이다. 대부분 중국인 유학생으로 이루어져 있다. 강의계획서에서부터 중국어가 크게 쓰여있어서 어느 정도 예상은 했는데 한국인으로서 굉장히 재밌는 환경이긴 하다.(교수님 성함도 특이해서 처음엔 중국인들을 위한 중국인 교수님의 강의인 줄 알았다.) 


 아!! 그리고 이 수업에 04학번 재입학자 여학생이 있다!! 노트북 와이파이 연결도 안 되어있어서 옆 사람 도움받는 모습에서 내가 보여서 그랬는지, 최고학번 완장을 양도할 수 있게 돼서 그랬는지 굉장히 제멋대로 정감이 갔다. 말을 걸어보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학교 와이파이를 아직 연결 안 하신 걸 보면 아마 이번 학기에 재입학하신 것 같은데 같은 재입학자로서 공감대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찾아올까? 그랬으면 좋겠다.     


 사실 이 과목은 원래 지난 겨울방학 때 두 번이나 밥을 사주셨던 교수님의 강의를 선택했었다. 근데 수강 신청에 우선권이 있는 4학년들이 이미 교수님의 강의를 먼저 다 채가서 신청도 못해봤다. 알고 보니 강의가 인기가 좋으신 분이셨다. 어쨌든 지금 듣는 리더십 개발은 그렇게 된 인연으로 수강하게 된 다른 교수님의 <리더십 개발>이다. 어떤 돌 하나가 인연의 물살을 갈라서 나는 다른 물줄기를 타게 된 것인데, 이게 더 잘 된 일일 수도 있는 것 같다. 


  제리뿐만 아니라 팀원들과 노션, 슬랙으로 소통해야 한다. 전부 처음 들어보고 써보는 것이다. 인스타그램도 할 줄 몰라서 애를 먹는 나에게 이 역시 도전이다. 디지털 약자를 극복하라고 주는 기회가 아닌가 싶다. 버스도 못 타고 키오스크도 못 썼었는데 저런 업무 플랫폼도 처음에만 낯설지 하다 보면 금방 적응하지 않겠나 싶은 여유가 생겼다. 아주 사소한 성공으로부터도 효능감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더니 정말 그렇다.


 마지막으로 자의식 과잉인지 모르겠으나(아마 그럴 것이다) 기분이 좋아지는 일도 있었다. 출석을 부를 때였다.


"아무개-"

"네, 제리."

"어, 00이~."


 다른 학생들한테는 교수님이 한 번도 친근감 있게 이름을 부르는 추임새를 넣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상상을 하게 됐다. 다른 리더십 개발 교수님이 히키코모리 출신 재입학생이 있다고 언질을 줬다거나 하는. 교수님이 뭔가 나를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학생들을 회사로 초대한다거나 같이 식사를 한다거나 와인을 함께 마시기도 한다는데 나중에 기회 되면 이것도 확인해 보자.




 +자의식 과잉하니 생각나는 일이 있다. 작년에 청년이음센터에서 보여줬던 연극 <망원동 브라더스>에서 김 부장 역을 연기하셨던 맹상열 님을 지하철역에서 본 적이 있다. 그때는 내가 어떻게 느꼈냐면, 맹상열 님이 연기를 하면서 무대 위 시점에서 봤던 관객인 내 얼굴을 기억하고 지하철 역에서 내 얼굴을 확인하려고 앞으로 가서 뒤를 돌아 나를 확인한 것 같다고 느꼈다. 이 정도면 정말 심각한 중증 아닌가? 그래서 나는 누군가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을 때도 일단 부정부터 한다. '저 이야기의 대상은 내가 아니야.' 하고. 자의식과잉 문제는 일단 나만 알고 있다가 일상생활에서 문제가 될 정도가 되면 무슨 수를 찾아보긴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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