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없다. 발이 뜨거울 정도로 방 장판이 열을 받던 집에 살았기도 하고, 에어컨이 있어도 에어컨을 틀고 산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아침 산책을 하면서 느낀다. 여름이 꽤나 괜찮은 계절이라고. '지금의 색깔은 참 예쁘구나. 여름만이 만들 수 있는 빛깔은 정말 특별하네.' 이렇게 예쁜 여름을 10번이나 놓치고 살았다.
똑같은 길을 낙엽이 가졌을 때도 있었고, 똑같은 길에 꽃잎이 살았을 때도 있었다. 그 똑같은 길을 지금은 이끼가 점령했다. '사람들도 잠깐잠깐 자기 순서대로 길 위에 존재했다가 사라지겠지.' 산책을 하다 보면 별 생각을 다 하면서 걷는다.
히키코모리로 지낸 총 10년, 공백의 10년이 아까워서 짬 내서 책도 읽으려고 하고,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고 그렇게 지내고 있다. 참.. 10년 동안 나눠서 천천히 했으면 여유 있고 얼마나 좋았겠냐마는 이미 지나갔으니 덤덤히 덮어둔다. 이번에 읽은 책은 <돈키호테>.
책을 통해 긴 여정을 동행했다. 답답하고 짜증이 났었다가 웃기고 재밌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고 속 시원하기도 했다. 최종적으로는 돈끼호떼가 죽음을 앞두고 알론소 끼하노로 돌아와 가족, 친구들과 이별하는 몇 페이지 동안에 엉엉 울었었다. 인생..은 아름답다. 역시 그게 맞는 것 같다.
"엮은이는 아는데요","김경식 씨."
최근 브런치를 글쓰기 플랫폼같은 느낌보다는 인스타처럼 쓰고 있다. 인스타그램은 사진이 잘리는데 나는 그걸 참기가 힘들다. 사진 크기 수정 앱까지 따로 쓰기에는 인스타 특유의 가벼움에 대한 장점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그건 그것대로 또 싫다. 그래서 요즘 브런치에 보상심리로 사진 범벅이 된 글을 쓰게 됐다. 그 바람에 애초부터 불투명했던 내 글쓰기의 방향성과 정체성이 더 이도저도 아니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컨텐츠에 따라 채널 분리는 분명히 필요한 일인 것 같은데 어떻게 나눠서 쓰면 될지 아직 잘 모르겠다. 요 며칠 이런 고민을 좀 한 것이다. 전에 썼던 글들이 더 매력 있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하고. 처음엔 분명 '글을 혹시라도 누가 볼까 봐' 두려워했었는데 이제는 누가 좀 더 많이 봐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변해있다는 게 신기하다.
비가 많이 온다. 신발 안에서는 발가락을 아무리 오므려봐야 소용없는데도 신발에 물이 들어올까 봐 한껏 발가락을 말아 넣는 나란 놈을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다.
부러워서 질투가 나고 속이 불편했던 일이 그 사람에게 결과적으로 큰 고통으로 매듭지어지는 일을 보면서 마음이 복잡했다. '그렇게 될 수도 있구나. 부러워하지 말아도 되겠다. 아니야, 난 다르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고양이 맛집>이라는 제목이 가지는 중의성이 거슬리긴 하지만 그대로 써야겠다. 나는 고양이 특유의 건방진 표정 때문에 고양이를 뭐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지만 귀여운 건 귀여운 거다. 그리고 '고양이'는 분명 끌리는 소재다.
"나랑 고양이 보러 같이 가지 않을래?",
"응, 근데 보러 갈 곳이 좀 높아. 도봉산이라고."
오늘 아침에 도봉산을 갔다. 비가 오는데 나 혼자 누가 봐도 야외활동하러 가는 차림으로 길을 걸으니 좀 그랬는데 도봉산 초입에 다다르자 모두가 우산을 쓰고 등산복 차림으로 있어서 마음이 편해졌다. 돈키호테는 산초랑 어울려야 하듯이 비슷한 사람끼리 같이 있어야 한다.
올라갈 땐 비가 왔고 내려올 땐 해가 났다. 여러가지가 다르다.
요즘 산을 열심히 다니는 건 서울 산 투어의 일환으로 진행 중인 내 나름의 게임 때문이다. 3주 전에는 인왕산-북악산을 갔고, 1주 전에는 용마산-아차산을 갔다. 이번 주는 도봉산-수락산이다.
국립공원이라 그런지 확실히 명산이긴 명산이었다. 계곡을 옆에 끼고 등산을 할 수 있는 것도 그렇고, 길 자체도 좋았다.
마당 바위에서 루트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지긋한 누님들 무리와, 지긋한 형님 한 분이 서로 가는 길이 달랐다. 아무래도 누님들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것을 더 지향하고, 형님들은 간단하고 위험한 것을 감수하는 경향이 있으니 지긋한 형님이 간 쪽으로 뒤따라 갔다. 그랬더니 신선대에 도착했다.
자운봉이 해발 740m고 신선대는 조금 낮은 726m였다. 정상에서 이번에도 단백질바와 물을 마시면서 쉬고 있는데 까악 거리는 소리가 처음 들어보는 볼륨으로 들리길래 뒤돌아봤더니 바로 옆에 까마귀가 앉아있었다.
'풍류를 아는 놈이네.'
'아, 아닌가? 등산객들이 주는 먹이를 노리고 온 건가?'
생각이 그쪽으로 미치자 웃음이 터졌다.
옆에 새로 올라오신 지긋한 형님분들에게 "조심히 가세요~." 하고 인사드리고 내려가려는데 오이를 주셨다.
이 이야기를 들은 셋째 누나는 "낭만의 땀내가 여기까지 난다 ㅋㅋㅋㅋㅋㅋ" 고 답장을 보냈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참 낭만 있네.' 싶었다.
신선대에 오를 때, 안개까지 자욱하게 껴있으니 정말 분위기가 등산이 아니라 등선을 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재수 없으면 진짜로 등선 할 수도 있겠다 싶어 조심조심 내려왔다.
도봉산이 고양이 맛집인 이유
정상에서 조금밖에 내려오지 않은 지점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계단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
'고양이가 여기 있다고??'
하고 놀라면서, 산길을 어슬렁거리며 걸어가는 고양이를 따라갔다.
고양이가 이내 등산로가 아닌 비탈로 사라지는 바람에 놓쳐버렸다. 좀 아쉬운 상태로 계속 내려갔다.
그러다 장대비가 그치고 해가 나서 그런 것인지, 하산길에 갑자기 고양이들이 계속해서 나타났다.
산을 올라가는 고양이의 씰룩대는 엉덩이를 보며 '과연 미니 산군이다.', '위엄 있네.' 생각했다. 까만 립스틱을 칠한 거 같은 고양이에게는 "여기 보세요~, 웃어보세요~." 얘기해도 반응이 없었다. 쳇, 고양이 녀석들이란.
갈색고양이는 얼굴이 예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미묘인가?
벤치에 고양이가 사람처럼 누워 자고 있어서 놀라기도 했다.
고양이를 잘 몰라서 무슨 행동인지 모르겠지만 귀엽다. 가려워서 저러는 거 같긴 하다.
올라갈 때는 비 때문에 서두르느라 지나쳤던 산장도 내려올 때 들러서 구경했다. 청년들이랑 도봉산을 같이 오게 된다면 정상은 힘들 것 같고, 산장까지만 왔다가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산장 야외 테이블 옆으로 계곡이 내려가고 있어서 느낌 있다.
도봉산에는 아주 작지만 폭포도 두 개나 있고, 산장도 있고, 고양이도 있다. 정말 괜찮은 산이었다.
도봉산을 내려와서 버스를 타고 서브웨이 수락산역 지점으로 이동했다. 로스트치킨 웨지감자 세트를 먹었다.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서브웨이였지만 지금은 앱도 깔았을 만큼 꽤 자주 이용하고 있다. 이것저것 먹어봤지만 입에 들어차는 느낌이나 묵직함이 로스트치킨 따라올만한 게 없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미지에 대한 두려움도 어느 정도 해소했으니 이 짓거리(자주 사 먹는 걸 합리화하는 것)도 적당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서브웨이에서 초록 쟁반을 다 비우고, 충전기에 꽂아 놨던 핸드폰도 챙겨서 수락산으로 갔다. 비교대상이 국립공원인 것은 좀 안된 일이지만 수락산은 많이 아쉽긴 했다. 길이 좋지 않고, "이리로 가는 게 수락산 가는 길인가요?" 하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4명이나 봤을 만큼 길의 직관성이 떨어졌다. 나도 올라갈 때 '아따메 길이 어디고 이거'를 몇 번이나 했다.
그래도 수락산은 수락산 나름대로 매력포인트가 있었다. 코끼리 바위도 그중 하나였고, 수락산은 고양이 대신 다람쥐가 있었다. 산장 대신 천막집 매점이 있고, 그리고 정상에 아이스크림이나 음료와 주류를 파시는 분이 계셨다. 이 분은 등산객들 사진도 찍어주시고 등산객들과 이런저런 대화도 많이 하시면서 정상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고 계셨다.
정상에서 바위 끝에 걸터앉아 생명체 같은 도시를 내려다보며 두 번째 단백질바와 물을 마셨다. 가져온 물의 양이 모자라 나도 뭐 하나 사야 될 것 같아 아저씨한테 갔다.
포카리스웨트(3,000원)를 마시면서 한숨 돌리는데 아저씨가 내 관상을 보시곤
"성격이 소심해. 걱정이 많고 예민하고 철저하게 하려 하고 그래. 성격 고치려고 해 보려고 뭐 하지 말고 그냥 있으라고. 지나다 보면 다 풀려~. 노후에 좋아."
보자마자 소심한 걸 어떻게 아신 건지 신기했고 3천 원으로 포카리도 먹고 상담까지 받으니 이득이다 생각했다. 자주 오라고, 놀러 오라고 하시면서 월요일날 비 오는 날 오지 말고 평일, 주말 다 있다고 덧붙이셨는데 언제 또 갈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전화로 미리 주문한 피자를 받아서 들어왔다. 지나가면서 보고 언제 한 번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이 적기인 듯했다. '베이컨 하와이안 피자 P'
P(퍼스널) 사이즈가 생긴 것과 관련된 인구통계학적, 사회적 문제에 대해 생각하면서 남은 귀갓길을 마저 갔다.
방에 도착해서 바로 피자부터 먹고 싶었지만 참았다. 일단 비와 흙으로 엉망이 된 냄새나는 신발부터 샤워실로 유배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방 정리를 하고 샤워를 했다. 샤워가 끝나고 한 번 더 참고 빨래를 돌리러 세탁실에 다녀온 후 물이 필요한 화분에 물을 줬다. 다음으로 쓰레기통과 종이 모은 것을 기숙사 쓰레기장에 가서 버리고 온 후 방바닥을 쓸고 닦았다. 화장실 바닥과 세면대도 닦았다. 그렇게 모든 일련의 소일거리를 빠르게 마친 후 먹는 피자는 조금 더 식기야 했겠지만 여전히 맛있었다.
오늘은 정말이지 완벽한 주말이었다. 아무 곳도 다치지 않고 산을 잘 다녀온 것도 그렇고. 하고 싶은 것도 했고, 먹고 싶은 것도 먹었고, 방 정비도 했다. SNS로는 가족과 친구들과 서로 소식을 주고받았다.아침과 오후에는 몸을 쓰고, 저녁엔 한가로이 글을 쓰는 조화로운 하루, 한 날을 보냈다. 이런 날이 나한테 왔다는 게 정말 감사하다.
그리고 이 정도 굴렸으면 인간적으로 오늘 밤에는 침대에서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기 전에 육체가 전원 꺼지듯이 꺼지고 늦잠 좀 자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