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기숙사 헬스장에서 종종 하는 생각이 있다. "출입 장부 미작성 시 벌점 부과"라는 규칙을 보면 떠오르게 되는 생각이다. 많은 학생들이 이 규칙을 잘 지키지는 않는데, 실제로 페널티가 주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규칙은 규칙을 지키는 학생들을 바보로 만들고 그것을 구경하며 킥킥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그렇고 다른 학생들도 그렇고 귀찮아도 이 무의미해 보이는 성실한 짓을 하는 학생들도 많다.
사람들은 하기 싫은 건 안 하는 사람을 보고 잘 따라 하면서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을 보고는 여간해선 따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한강에 갔을 때, 쓰레기를 두고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도 그냥 버리고 가네."라고 하면서 그들을 따라 쓰레기를 두고 가기 쉽다. 하지만 사람들은 쓰레기 처리를 잘하고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굳이 눈여겨보거나 마음에 담아두지 않을 것이다.
유치원에 만 3~4세 아이들도 "누구는 왜 안해요~?"나, "누구도 안 하는데요~?"라고 말하면서 장난감 정리 시간에 딴짓하는 걸 보면 인간 본성이 그런가 보다. 이런 아이들의 시야에는 장난감 정리를 잘하는 친구들이 인식되지 않는 것만 같다. 그리고 난 초등학생 때부터 이런 인간 부류의 동급생 녀석들이 싫었다. "왜 저한테만 시켜요?"라고 말하는 녀석들을 보면 속으로 '너한테만 시킨 적 없어 이 멍청아. 다른 애들은 이미 했거나 하는 척이라도 했다고'하곤 생각했다.
헬스장 방명록을 적으라는 규칙도 마찬가지다. 이 규칙을 만들었을 때는 지금 상황에서는 잘 모르겠긴 해도 분명 뭔가 이유가 있긴 했을 거고, (외부인 출입과 관련된 문제였다던지) 아마 공동체의 안전을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침마다 6시 30분~40분 사이에 오는 3층 녀석에게 내 운동이 끝났더라도 일부러 운동을 조금 더 한다. 보통은 벤치프레스를 10분 정도 더 하는 식으로 기구를 늦게 비워준다. 왜냐면 걔는 이름을 적지 않을 뿐 아니라 신발도 바깥에서 신던 걸 그대로 신고 운동하기 때문이다. (기숙사 헬스장 전용 실내화 규칙도 있다.) 하여간 난 그런 애들이 싫다.
나의 쫌스러움은 여기까지만 소개하고 화요일에 있었던 좋은 일을 남겨봐야겠다. 기지개센터의 원예활동 4회차 마지막 일정으로 꽃바구니 만들기를 했다.
비누 만들기나 향초 만들기보다 즐겁게 했는데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서 인 것 같다. 저번에 센터에서 휘낭시에 만들기를 할 때 우울했던 이유 중에 하나도 불필요할 정도로 정해진 틀대로 만들도록 시켜서인 것 같다. 나는 꽃이든 디저트든 기호를 자유롭게 반영시킬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를 바라나 보다.
7월 24일 수요일:
어제 만든 꽃바구니를 아침에 출근할 때 들고 가서 유치원 선생님께 선물로 드렸다. 처음부터 계획된 선물 대상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아주 흡족했다. 왜냐면 이 선생님은 가끔 나에게 커피도 주시고 캔디 같은 것도 주셨었는데 거기에 대한 답례를 따로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날 오후에 학교 자연사박물관에 가야 할 일정이 있어서 조기퇴근을 하는데 거기에 대한 미안함도 누그러뜨려줄 쿠션이 되어주었기 때문에 좋았다.
"선생님, 혹시 꽃 알레르기 같은 거 있으세요?"
"그럼 이거 퇴근하실 때 가져가주세요. 선생님 드리려고 가져온 거예요."
선생님 드리려고 만든 건 아니지만 어쨌든 드리려고 가져온 건 맞습니다. 그리고 "어머 감동이에요. 감사합니다" 하시는 선생님의 말은 굉장히 듣기 좋았다.나도 뭔가 받게 된다면 "뭘 이런 걸 다"나, "아유 괜찮아요." 같은 말들 보다는 "감동이에요, 고마워요."라고 말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퇴근을 오후 3시 반에 하고 바로 동대문구 가족센터에서 진행하는 "걸어서 동대문 속으로"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다른 1인가구 청년이 정보를 물어다 주셨는데, 탐방 목표지가 마침 다니는 학교여서 둘이서 자연사 박물관 구경도 하고 밥도 먹고 카페도 가고 술도 먹고 다 했다. 특히 저녁을 먹으러 간 분식집은 맛도 좋고 가격도 상당히 괜찮았다. [푸른 하늘]이라는 곳이었는데, 이 집 라볶이는 얼마 전 말로만 듣던 신당동 떡볶이를 먹고 샜던 김을 채워주고도 남았고, 참치 김밥도 묵직하니 좋았다. 이 날 밥 먹으면서, 수박 주스 먹으면서, 맥주 마시면서 수다를 몇 시간이나 떨었는지 모르겠다. 타이밍 좋게도 유치원 방학 전야제를 제대로 하는 셈이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나도 이제서야 진짜 방학이 시작되는 느낌이 들어서 마음이 편안했고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7월 25일 목요일:
유치원 방학 첫날. 전 날 너무 신나게 놀아재낀 탓인지 아니면 그동안 쌓인 피로들이 긴장이 풀리면서 한 번에 오픈런을 해온 탓인지 아침에 눈을 뜨니 컨디션이 상당히 나빴다. 손과 팔에 쥐가 나서 오랫동안 풀리지를 않았고 땀이 계속 났다. 몸살이 온 것이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다."라는 말이 있다. 비가 오면 응당 웅덩이가 생기기 마련인데, 나도 말 그대로 땀을 비 오듯 흘려서 방바닥에 웅덩이를 만들어버렸을 지경이었다. 땀이 너무 많이 나서 버틸 수가 없어서 샤워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와 몸을 닦은 후 침대에 기역니은(ㄱㄴ) 모양으로 엎드려 있었다. 몸살 기운이 오니 허리까지 더 아팠기 때문에 눕기도 싫어서 이런 모양으로 뻗어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속옷을 입으려고 일어나는데 바닥에 땀웅덩이로 추정되는 것이 생겨있었다. 아마 몸에서 난 땀도 허벅지를 타고 내려 한 곳에 모였던 모양이었다. 그런 광경은 인생에서 처음 보는 것이어서 나는 꽤나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후에도 비슷한 상태로 계속 기운이 없어서 생활을 포기하고 침대 위에 누워서 쉬었다. 저녁에는 뮤지컬 <빨래>를 보러 가야 했기 때문에 그전까지 어떻게든 회복을 빠르게 해야 했다.
다행히 상태가 좀 나아져서 공연을 보러 갈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빨래>는 가창실기 수업 쉬는 시간에 공연 정보를 몇 번 검색해 봤을 정도로 보고 싶은 마음이 이미 방학 전부터 커져있는 상태였다. 그러다가 기지개센터를 다니는 길에 배너나 포스터를 보다 보니 미루다 까먹지 않고 예매를 할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유니플렉스 건물을 나와 가벼워서 촉촉한, 기분 좋게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같이 좋은 공연이었다며 가족과 친구, 연인과 행복해했다. <빨래>는 그런 공연이었다. "1+1, -1"이나 "빵"의 제일서점 창립 신화 같은 재치 있는 장면들, 그리고 그 밖에 뛰어난 노래, 연기 등을 일일이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까만 아스팔트 위 빗물이 하얗게 반짝거리는 예쁜 밤의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며 '다른 사람과 한번 더 와도 되겠다.'는 생각도 했다. 사실 영화나 연극을 보고 나와서 다른 사람의 감상을 듣다가 내 감상이나 여운을 곱씹는 시간을 방해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보고 나서 만족스럽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을 찾으니 또 알려주고 싶어졌나 보다. 이 건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 중에 하나였다. 멍청한 데 쓰는 돈을 좀 아껴서 이런 걸 좀 더 자주 즐기고 싶어졌다. 이 날 밤에는 굉장히 행복하게 잠에 들었다.
7월 26일 금요일:
금요일에는 굉장히 오랜만에 청년들과의 자조모임이 예정된 날이었다. 컨디션이 영 아니다 싶으면 불참하려고도 했지만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쩐 일인지 몸살이 하루 만에 멎어 있었다. 그래서 약속된 성신여대역에서 만나 카페를 갔다. 나는 싸기도 했고 아빠가 좋아하는 메뉴라 에스프레소 콘파냐를 먹었다. 카페에서 대화할 동안 청년들이 한 두 명 더 합류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모두가 모였을 때 밖으로 나와 걸으면서 서울 유람도 했다.
고려대도 갔다. 고려대는 내 기억상, 작년에 재입학이 정해진 후 첫 유람 스팟으로 갔던 곳이었다. 밖으로 나가는 연습, 버스 타는 연습,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을 보고도 방으로 도망치지 않고 거리에 발 붙이고 있기 위한 연습을 위해 갔었다. 그리고기숙사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2023년 서울시 고립은둔청년 지원사업 라디오 홍보를 듣고 지원 사업에 지원을 하게 됐다. 그 지원사업에서 만나고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과 다시 고려대로 돌아오게 되어서 참 뜻깊었다.
한 때는 밖에 나오는 것이 힘들어 방에만 있었던 사람들이 모여서 둘둘 짝지어 이야기를 나누며 골목을 걷는다. 걷다 보면 자연스레 옆자리 대화상대가 바뀌어있기도 한다. 좋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도 좋고, 나와 마찬가지로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 노력 중인 청년들도 좋다. 모임이 끝나고 사진들을 다시 한번 볼 때 사진에 찍힌 청년들의 얼굴이 예전과 달라 보였다. 잘 웃고 있었다.
'이 사진에 다른 사람도 함께 담겼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자조모임의 유일하게 좋지 않은 점이다. 그리고 분명히 아닌 것을 아는데도, 가끔은 이런 생각들을 나만 일방적으로 하는 것 같이 느껴져 마음이 복잡해지기도 한다. '복잡한 마음'에는 외로움, 고독, 실망, 의욕상실, 불신, 의심, 회의 등이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믿는 것을 선택한다. 이런저런 불편이나 갈등이 없지 않지만, 우리끼리조차 믿지 못하면 조금 많이 슬플 것 같다. 세상이라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
건강 생각해서 너무 잦은 술자리는 피할 겸, 몸살도 의식할 겸, 컨디션 관리를 위해 고대 정문 앞에서 청년들과 인사 나누고 버스를 타고 조금 먼저 귀가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놀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