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에 활짝 핀 '풍란 꽃' 이 주는 소소한 기쁨
국문학자이자 시조시인인 가람 이병기는 난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산 난(蘭) 애호가였다. 그는 수필 ‘풍란’에서 ‘ 고단하고 바쁜 시절에 ‘난’에게 큰 위안을 받았다며 “ 그 푸른 잎을 보고 방렬(放列)한 향을 맡을 순간엔, 문득 환희의 별유 세계(別有世界)에 들어 무아무상(無我無想)의 경지에 도달하기도 했다”고 썼다.
가람은 풍란을 소재로 시도 남겼다. “ 잎이 빳빳하고도 오히려 영롱하다. / 썩은 향나무 껍질에 옥 같은 뿌리를 서려 두고 / 청량한 불줄기를 머금고 바람으로 사노니 / 꽃은 하이하고도 여린 자연(紫煙) 빛이다. / 높고 조촐한 그 품(品)이며 그 향을 /숲 속에 숨겨 있어도 아는 이는 아노니”
작년 봄 지인에게 선물 받은 우리 집 ‘풍란’을 보면서 그 시에 격하게 공감했다. 소담한 순백의 화분에 담긴 풍란 중 가지 하나가 마치 악수하자며 손을 내밀듯 한쪽으로 길게 뻗어 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하던 차에 입춘도 되기 전에 한 다발 새초롬한 보랏빛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풍란은 주로 초여름에 꽃이 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원예화된 풍란은 뿌리를 길게 받으면 철(계절) 없이 피기도 한다니 놀라울 것은 없다. 하기야 언제 피면 어떤가. 그 어여쁜 자태와 그윽한 향이 거실 분위기를 바꿔나 귀가할 때마다 소소한 기쁨을 누린다.
풍란은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멀리 전해진다 해서 이름이 붙었다. 어부들이 바다에서 짙은 해무를 만나 길을 잃었을 때 바닷가 바위에 뿌리를 내린 풍란의 꽃향기를 맡고서 육지에 가까워졌음을 짐작했다는데 풍란은 의외로 향이 진하다.
입춘한파에 꽃을 피운 것이 하도 대견해 사진으로 남겨둘 요량으로 자세히 바라보니 무아무상까지는 아니라도 잠시 매혹의 늪에 빠지게 한다. 풍란의 꽃말도 ‘인내’와 ‘참다운 매력’이다.
그나저나 난은 적어도 10년 이상은 길러봐야 그 미립(경험을 통해 얻은 이치나 요령)을 안다는데 감상만 좋아하지 가꿀 줄 모르는 풋내기 난 애호가가 얼마나 돌볼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