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반가운 '오보'다. 기상청 예보는 틀렸다. 하긴 세트당 550억원이라는 기상청 슈퍼컴퓨터라고 해서 변화무쌍한 날씨를 늘 족집게처럼 맞출 것을 기대할 수 없다. 8일 강원도 정선 함백산 날씨 얘기다.
기상청은 이날 함백산(해발 1572m)) 한낮 기온이 영하 9도이며 정상 부근에 강풍이 불면서 체감온도는 영하 18도에 달할 것이라고 예보했다. 만약 예보가 정확했다면 한파에 호기롭게 함백산을 갔다가 매서운 강추위에 시달렸을 것이다.
주말 오전 10시쯤 도착한 만항재(해발 1330m)는 전날 내린 폭설로 ‘겨울 왕국’이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순백의 미를 드러내듯 새하얀 드레스를 걸친 '엘사'가 숲속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영화속 분위기다. 내가 그토록 기대했던 풍경이다.
다행히 ‘한파특보’로 연상되는 ‘귓 볼을 붉게 물들이거나 살을 에는듯한 칼바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혹시 초봄인가 착각할 만큼 하늘은 화창하고 기온은 비교적 포근했다.(물론 동계강화 훈련에 나선 운동선수들처럼 옷은 단단히 껴입었다)
대한민국에서 자동차로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고개인 만항재 하늘숲길 공원은 그 자체가 사계절 관광명소다. 도보여행자들이 즐겨찾는 운탄고도 1330길 5구간의 날머리이기도 하다.
봄, 가을엔 야생화가 지천이지만 이날 눈에 파묻힌 공원엔 낙엽송 가지마다 상고대가 장관을 이뤄 일상에 지쳐 메마른 감성을 자극했다. 그러고 보면 잎새를 모두 떨군 헐벗은 겨울나무는 눈이 참 고마운 존재다. 앙상한 가지마다 눈꽃을 피게 해 뭇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만항재에서 바라본 함백산 일대는 온통 설국이다. 고개를 드니 티끌 하나 없이 쾌청한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설경은 아름답고 우아했다. 짙은 선글라스를 착용하지 않고는 눈이 시릴 만큼 주변 풍경이 눈부시게 산뜻하다.
아이젠과 스패치를 착용할 땐 발목이 푹푹 들어가는 눈 길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볍게 흥분됐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부드러운 눈밭 위에 미끄러져 자빠지든 일부러 넘어지든 떼굴떼굴 뒹군다면 동심으로 돌아간 듯 즐거웠을 거다. 이런 경험은 폭설도 순식간에 녹는 도시에선 절대 누릴 수 없다.
요즘 TV 기상뉴스를 듣다 보면 기상 캐스터의 호들갑에 마음마저 썰렁해지지만 기상청의 한파특보도 함백산 탐방객들의 열기는 꺾지 못했다. 날씨와 상관없이 설경을 보러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탐방객들로 등산로는 정체 현상을 빚어질 만큼 인산인해를 이뤘다.
함백산 자체가 겨울산의 다채로운 매력을 두루 갖추고 있지만 탐방객들이 소백산, 월악산, 태백산, 지리산 등 국립공원이 폭설 때문에 폐쇄돼 이 산으로 몰린 점도 있을 터다. 대만 또는 유럽에서 온 듯한 외국인들도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많이도 찾아왔다. 이날 수은주가 오르지 않았다 해도 산꾼들의 뜨거운 열기에 추위는 저 멀리 달아났을 것이다.
비좁고 가파른 오르막에 백 미터 이상 늘어진 긴 줄을 따라 간신히 오른 함백산 정상은 전날 내린 눈에 씻겨 사라진 듯 미세먼지 한 톨 없이 맑았다. 하늘을 바라보니 푸른색이 아니라 바다 빛깔처럼 파란색이다. 그만큼 공기가 청정하다는 뜻이다.
국내에서 6번째로 높다는 산 정상 돌탑 주변에서 360도 파노라마 뷰를 감상했다. 산꼭대기라서 바람은 다소 차가웠지만 눈은 호강했다. 왜 수많은 탐방객들은 이런 훌륭한 풍경을 두고 정상석 인증샷에 매달리는지 모르겠다.
함백산을 가운데 두고 대덕산과 백운산, 매봉산, 태백산의 굵고 거친 능선은 강한 기운을 내뿜으며 용틀임하듯 동서남북으로 굽이굽이 펼쳐졌다. 눈꽃, 설경, '압도적인 뷰'까지 만항재~함백산으로 이어진 코스는 겨울에 더욱 돋보인다. 소문난 음식점에 고객이 몰리듯 '풍경 맛집'도 탐방객들이 몰리긴 마찬가지다. 아무리 혹독한 악천후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