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행일치와 포용력 있는 정치로 국민통합을 이룬 노정객, 청렴하고 검소한 정치인의 모범을 보인 리더, 무엇보다 높은 지지율에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난한 농부로 돌아간 위대한 지도자.
34년 된 폭스바겐 비틀을 타고 다닌 무히카 전 대통령
우루과이의 호세 무히카 전 대통령이 향년 89세로 영면했다. 2010년부터 2015년까지 대통령직을 맡았던 그는 어떤 국가지도자도 흉내 낼 수 없는 '동화 같은 에피소드'의 주인공이다.
우루과이는 남미의 대국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샌드위치처럼 낀 인구 340만 명의 작은 나라지만 확실한 자랑거리가 있다. 남미에서 드물게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부정부패가 덜하기로 명성이 높다는 점이다.
우루과이가 남미의 모범생이 된 것은 청렴하고 훌륭한 지도자 덕분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불린 호세 알베르토 무히카 코르다노(호세 무히카)다.
그의 국민들에게 감동을 준 대통령이다. 2012년 겨울 무히카는 강추위가 몰려오자 '대통령궁은 인민의 재산'이라며 노숙하던 시리아 난민들을 내줬다. 그는 아내 루시안 토폴란스키(80)와 다리 하나를 잃은 반려견을 데리고 자신의 사저인 오두막 같은 농가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대통령 집무실로 출퇴근했다.
그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스스로를 '농부'라고 했지만 젊은 시절엔 '게릴라'였다.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선 1960년대 투파마로스 인민해방운동(MLN-T)에 합류해 무장반군이 됐고 도심 하수구를 거점으로 게릴라 투쟁을 벌여 '로빈 후드'라는 닉네임이 붙기도 했다. 부인도 같은 게릴라 출신이다.
반군활동으로 37세에 투옥돼 14년간 장기수로 지내다가 석방된 뒤 정계에 투신해 하원의원, 상원의원, 농축수산부장관을 거쳐 2009년 11월 대선에서 중도좌파연합 프렌테 암플리오 후보로 나서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온갖 고생 끝에 대통령이 됐다면 호사를 누릴 만 하지만 그는 결코 초심을 잃지 않았다. 2010년 취임 당시 그의 전 재산은 현금 1800달러(195만원)와 1987년식 하늘색 폴크스바겐 비틀 한 대 그리고 축사를 연상시킬 만한 초라한 농가가 전부였다. 그나마 대통령 월급 1만달러 중 10%만을 쓰고 나머지 90%는 자선단체나 NGO에 기부했다.
재임 기간에도 평범한 농부의 삶을 병행하며 우물에서 길어온 물로 빨래도 직접 하고 마당에 꽃과 화초를 가꾸었으며 직접 낡은 차를 몰고 출퇴근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삶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라고 했다.
운동권 행세만 했어도 권력만 잡으면 보상을 받겠다는 심리가 발동해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사법기관을 제멋대로 주무르고 세도를 부리고 벼슬을 탐하는 천박한 권력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신의 남루한 농가에서 반려견과 함께
하지만 지도자가 검소한 것은 덕목이긴 하지만 업적이 될 수는 없다. 더구나 우루과이는 군부독재로 나라가 분열되고 경제위기에 빠진 나라였다. 빈곤한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사회안정과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그는 진보편향적인 정책을 펼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실용주의 정책으로 우루과이 정치·경제 발전의 토대를 닦았다. 마약범죄를 끝장내기 위해 정부의 통제 안에서 마약의 경작·유통을 허용하고 사회 취약계층을 위한 주택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자신의 급여까지 보탰다.
또 총 소득세 정책을 통한 조세개혁으로 빈곤 감소와 성장률을 높였으며 이념과 정파를 초월한 정책으로 국민의 '책임감 있는 자유'를 보장했다. "혁명이란 사고의 전환이다"이라는 그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퇴임 전 65%에 달하는 높은 지지율로 재선을 할수도 있었지만 그는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는 물러날 때는 물러나야 한다"며 출마하지 않았다. 그는 은퇴 연설에서 "수십 년간 내 정원에 증오는 심지 않았다. 증오는 어리석은 짓이다. 인생의 큰 교훈이었다"고 말했다. 국민들에게 ‘우리 호세’로 불렸던 무히카 만이 할수 있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