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도 풍경도 활어처럼 펄떡이는 그 길

경북 영덕 해파랑길 21코스(블루로드 B코스) 트레킹

by 박상준


겨울치고는 포근한 새벽 ‘환상의 바닷길’을 찾아 경북 영덕 블루로드 B코스로 떠나는 여정에서 비틀스의 명곡 ‘the long and winding road’(멀고도 험한 길)이 떠올랐다. 물론 영덕이 아주 멀지도 않았거니와 고속도로가 험할 리도 없다.


하지만 블랙아이스 현상으로 당진~영덕 간 고속도로 반대편 차선에서 30중 추돌사고가 발생해 5km에 걸쳐 재난영화 같은 상황이 연출됐고 차창엔 가랑비가 내리거나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기사는 긴장했고 버스는 조심스레 고속도로를 달렸다.


더구나 기상예보는 하룻사이에 변덕을 부렸다. 영덕은 티끌하나 없는 쾌청한 날씨에서 비바람이 부는 악천후로 돌변했다. 마음이 어지러웠다. 동해바다에서 시작하는 올 시즌 첫 트레킹은 과연 고행길이 될 것인가.



날씨와 인생사는 비숫하다. 늘 예상치 못한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항상 변수에 대처하고 현실에 순응해야 한다. 영덕에 들어서자마자 하늘이 맑개 갰다. 우려했던 강풍은 다소 사그라들었다. 이 보다 더 나은 겨울날씨를 찾아볼 수 없다.


영덕 블루로도 B코스(해파랑길 21코스)의 들머리인 청포말등대에 서니 눈이 시릴 만큼 푸른 바다에서 동해의 힘찬 기운이 느껴졌다. 구름 속을 비집고 나온 햇살이 바다를 조명처럼 비추었다.


이 길은 15㎞ 내내 쪽빛 바다를 곁에 두고 걷게 된다. 청포말등대에서 바다로 내려가는 길부터 마음을 들뜨게 한다.



대탄, 오보, 노물 포구를 지나면서 솔숲과 바다가 조화를 이룬 해안선이 거친 파도처럼 다이내믹하게 연결된다. 수억만 년에 형성된 기기묘묘한 기암괴석이 ‘지질과 바위의 전시장’이라고 할 만큼 바닷길을 풍성하게 장식했다.


해안 오솔길에선 수시로 초소를 만난다. 그 초소는 지금 말끔하게 리모델링돼 나그네의 쉼터가 됐다. 과거 무장공비들을 막기 위해 밤낮없이 해안 보초를 서던 초병들이 다니던 길에 철조망이 걷히고 일반인의 출입이 가능해지면서 나그네가 사랑하는 길로 거듭났다.


파도는 쉴 새 없이 밀려와 갯바위에서 부서지고 바닷물은 잉크를 뿌린 것처럼 눈이 시린 쪽빛이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직접 보면 알 수 있다, ‘블루로드’라는 이름에 공감이 갔다.




하지만 이 길은 모진 수난도 겪었다. 지난해 영덕을 휩쓴 화마(火魔)로 코스도 일부 손상을 입었다. 풍광이 수려한 일부 구간의 테크길이 화재로 유실돼 도로변을 걷는 곳도 있다. 길 인근엔 아직도 재난을 당한 주민들의 임시 거처가 비바람을 맞고 있다.


우리는 다시 해안 데크길로 내려와 경정포구까지 걸었다. 이곳은 반은 어선이 정박해 있고 반은 해변이다. 포구 앞에 BTS가 뮤직비디오를 찍었다는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가 서있다. 글로벌 팬들은 이곳 풍경이 낭만적으로 보인 터다. 포구는 다소 산만하지만 어촌의 정취는 생생하게 살아있다.


대게철 행락객들로 붐비는 축산항에서 대미를 장식했다. 4시간이 걸렸다. 점심식사를 한 뒤 해발 78m의 죽도산으로 향했다. 파릇파릇한 조릿대 사이에 조성된 테크길로 정상에 올라 윤슬로 반짝이는 동해바다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강풍에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지만 장쾌한 바다 풍경에 가슴이 탁 트인다.



블루로드 B코스는 부산 오륙도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총 50개 구간의 해파랑길 중 ‘베스트 3’에 꼽고 싶은 아름다운 길이다. 전체적으로 강릉의 유료 바닷길 코스인 ‘부채길’보다 더 나은 절경을 품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난이도도 너무 순하지도 그렇다고 과하지도 않은 길이다.


데크길은 동절기에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있었다. 불쏘시게처럼 검게 탄 나무데크가 화마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리모델링이 마무리되면 ‘환상의 바닷길’이라는 닉네임에 걸맞은 명품 바닷길 코스로 거듭날 것이 틀림없다.


귀로에 고속도로는 전혀 다른 풍경이 전개됐다. 이번엔 차창을 가릴 만큼 심한 눈보라다. 벌써 도로 주변 산들은 설산이 됐다. 아침 겨울비를 시작으로 진눈깨비, 쾌청한 하늘, 해풍에 눈보라까지 ‘날씨의 종합판’이다. 활어처럼 펄떡이는 영덕 블루로드 B코스를 걸은 주말은 하늘마저 변화무쌍했다. 그게 동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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