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신한 이미지와 절제된 시어로 한국 현대시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정지용 시인과 박정희 전 대통령 부인인 육영수 여사는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두 사람은 학교 선후배이자 이웃사촌이었다.
충북 옥천군 옥천읍이 고향인 두 사람은 생가도 멀지 않다.
육영수 생가와 정지용 생가는 불과 300m 떨어져 있어 한동네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둘 다 인근 옥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선후배 사이다.
정 시인은 1902년생, 육 여사는 1925년생으로 나이차가 많아 서로 교류할 일은 없었지만 10대 때부터 낭중지추(囊中之錐/주머니 속의 송곳) 같은 문재(文才)를 자랑하던 정지용과 대지주였던 육영수 집안은 서로 잘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 정부 시절 정지용은 친북 시인으로 낙인찍혀 주옥같은 시가 금기의 대상이었다.
초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던 휴일, CNN이 한국의 50대 해돋이 명소로 꼽았던 옥천 용암사(장령산)를 간 김에 육영수 생가와 정지용 생가를 찾았다.
용암사는 CNN이 감탄할 만큼 능선과 운해(雲海) 위로 떠오르는 일출이 신비로움을 듬뿍 안겨주는 곳이지만 이날은 초미세먼지가 시야를 가려 풍광을 완전히 망쳤다.
용암사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육영수와 정지용의 집은 한 마을에 있지만 집 규모와 분위기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났다.
한쪽은 고래등같은 전통한옥에 99칸이나 되는 대저택이었지만 정지용 생가는 손바닥만 한 마당에 감나무 한그루가 있는 방 두 칸짜리 초가집이었다.
육영수 생가를 처음 찾는 사람은 저택 규모에 살짝 놀란다. 집을 둘러보는데 한 70대 관람객은 "경주 최 부잣집 저택보다 크고 호사스럽다"고 했다.
주로 궁궐에만 있는 석빙고와 배구장만한 연못도 있으니 어지간한 고관대작 부럽지 않았을 터다.
육영수 부친인 육종관은 미곡 도매상, 금광, 인삼가공업으로 엄청난 재산을 축척한 인물이다. 여러 사업을 벌여 성공한 것을 보면 재테크의 귀재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은 대나무 숲과 정자가 있는 뒤 뜰 과수원을 포함해 대지 8천 평에 99칸의 대저택을 짓고 수십 명의 하인을 부리고 살았다고 한다.
지금 생가는 옥천군이 육영수의 회고와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원래 부지에 원형 그대로 옛 집을 되살려 2011년 다시 조성한 것이지만 옛날의 영화(榮華)를 떠올리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육 여사는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를 나온 뒤 상경해 배화여고를 졸업했으나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옥천여자전수학교(현 옥천여중)에서 1년 3개월간 가사 교사를 했다.
아마도 교사 시절에도 생가에서 부모와 함께 윤택한 생활했을 것이다. 또 행랑채, 사랑채, 본채, 안채, 뒷동산까지 갖춰져 있으니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을 듯하다.
생가에는 육영수가 살던 방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데 집 터는 수천 평이지만 방은 혼자 간신히 누을만한 크기인 2평도 채 안될 만큼 작은 것이 이채로웠다.
육영수가 이 집을 떠난 것은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12월이었다. 그해 이종사촌이자 박정희 대구사범 1년 후배였던 송재천의 소개로 당시 33살 이혼남이었던 육군 소령 박정희와 결혼했다. 둘의 나이 차는 7살.
부친 육종관이 완강하게 반대했으나 육영수가 박정희에게 호감을 가졌고 친정어머니 이경령도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결혼에 골인했다.
하지만 육종관은 가진 것이 없는 군인인 데다 '돌싱'인 박정희가 맘에 안 들어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경제적 지원도 끊을 만큼 딸의 결혼에 실망했다는 일화가 있다.
육영수의 선택은 과연 옳았을까. 박정희가 5^16 혁명에 성공하면서 그는 결혼 12년 만에 '퍼스트레이디'가 됐다. 그의 생가에는 대통령 영부인 시절 활동했던 흑백사진들이 집안 곳곳에 전시돼 있었다.
하지만 영부인 시절 생가를 찾았다는 사진기록은 보이지 않았다.
육종관은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나서도 한동안 사위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설이 있는 것을 보면 1965년 유명을 달리하기 전까지 불편한 관계였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육영수는 1974년 8^15 광복절 기념식에서 북한 공작원 문세광이 쏜 총에 맞아 이른 나이인 46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했다.
육영수 생가를 둘러보다 보면 장녀인 박근혜 전 대통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대통령이 됐을 때 이 집도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육종관의 집은 여전히 고대광실(高大廣室)의 면모를 보이고 있지만 박근혜는 사회와 담을 쌓은 비좁은 공간에서 기약 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 시절만 해도 이 집은 주말만 되면 관람객들로 몸살을 앓을 정도로 붐볐지만 문재인 정부 이후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하지만 지난 8월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이 집을 찾으면서 다시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이때 여권은 별 반응이 없었지만 정작 보수인사인 변희재 미디어워치 고문과 조원진 우리공화당 대표가 강하게 반발했다.
조 대표는 "(박 전 대통령을) 마녀 사냥한 윤석열 후보가 육영수 생가를 방문했다는 것은 거짓 가면놀이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대선을 앞둔 정치권의 뜨거운 관심과 달리 주말 육영수 생가는 몇 팀의 관람객들만 조용히 관람하며 전통한옥의 아름다움과 지금은 볼 수 없는 연자방아, 뒤주 등 과거의 유물을 가리키며 조근조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육영수 생가는 수십 개의 국화꽃 화분을 집안 곳곳을 화사하게 꾸미고 세심하고 깔끔하게 관리해 화장실과 난방시설만 갖춘다면 한옥체험시설로 활용해도 될 것 같았다.
얼마 전 '하늘의 별'이 된 가수 이동원과 테너 박인수의 노래로 익숙한 '향수'의 시인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은 육영수 생가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었다.
정지용 생가는 지금은 한국민속촌이나 아산 외암 민속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두 칸짜리 소박한 초가집이다. 손바닥만큼이나 작은 마당엔 헛간과 감나무 한그루가 정겹게 서있다.
한약방을 했던 부친은 한때 재산을 쾌 모았으나 어느 해 홍수피해를 입어 가세가 기울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사한 곳이 지금 생가와 문학관이 터를 잡고 있는 옥천읍내 개천가다.
그의 생가에 들어서면 시에서 묘사한 대로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초라한 지붕엔 서리 까마귀가 우짖고 외양간에 매둔 얼룩백이 황소가 게으른 울음을 우는' 당시의 정경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고향의 정경은 평화롭고 아늑했지만 당시 부친은 처가 친척의 농장에서 머슴을 살았다고 하니 4대 독자로 자존심이 강한 소년 정지용에겐 큰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정지용 역시 육영수가 나온 옥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해 4년간 한문을 배우다가 휘문고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고교를 나온 뒤에도 장학금을 받고 일본 교토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입학한 것을 보면 보기 드문 수재였던 것 같다.
이후 모교인 휘문고 영어교사, 광복 후엔 이화여전 교수, 경향신문 주간 등을 역임했고 한국전쟁 중 납북됐으니 이곳 생가는 어린 시절 13년만 살은 셈이다.
하지만 정지용은 여전히 옥천군민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다. 탁월한 언어감각으로 한국 현대 시사(詩史) 그 자체라는 평을 듣는 정지용은 옥천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시인중 한 사람이다.
옥천읍 '향수'길엔 그가 한국시단에 끼친 업적을 기리는 정지용 문학관이 있고 대청호반 '향수호수길'을 걸으며 글판에 적힌 그의 아름다운 시들을 낭송할 수 있다.
초가집으로 지은 정지용 생가는 작고 초라하지만 그 집과 마을에서 뛰어놀고 배우고 자라며 시인으로서 꿈을 일구었다.
그는 일본에서 유학할 때인 23세에 탈고한 시 '향수'는 정겹고 토속적인 언어로 고향의 정경을 풍경화처럼 그려내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애송시가 됐다.
정지용과 육영수는 한동네에서 태어나 전혀 다른 삶을 살았지만 옥천이 낳은 한국 현대문학과 현대사에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인물들이다.